정재영(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뷰어스=남우정 기자] “집에선 내 얘기를 들어주질 않아요”
자리에 앉자마자 호쾌한 웃음이 터진다. 집에선 말을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며 정재영은 인터뷰 자체를 반가워했다. 유독 밝은 기운이 넘쳤다. 아무래도 영화의 영향이 아예 없진 않았을 것 같다. 오랜만에 상업 영화로 돌아온 정재영이 선택한 ‘기묘한 가족’은 유쾌한 좀비극으로 웃음으로 무장한 작품이다.
‘기묘한 가족’은 조용한 마을을 뒤흔든 멍 때리는 좀비와 골 때리는 가족의 비즈니스를 그린다. 정재영은 망한 주유소 집 장남 준걸 역을 맡아 좀비와의 전면전을 펼친다. 정재영은 자칭 좀비 마니아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 좀비물 ‘킹덤’도 이미 본 상황이었다. 좀비 마니아인 정재영에게 ‘기묘한 가족’은 운명적 작품인 셈이다.
“아예 좀비물을 모르면 시나리오를 보고 ‘이게 뭐야’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난 다 봤기 때문에 신선했어요. 좀비 마니아로서 좀비물은 기존 방향에서 틀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좀비라는 걸 전혀 모를 것 같은 농촌에서 좀비를 믿는다는 설정 자체가 우스꽝스럽죠. 다만 좀비물에 대한 관심이 없으신 분이라면 낯설 순 있을 것 같아요”
시기도 딱이다. 최근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좀비 장르의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시장 안에서도 ‘기묘한 가족’은 독특해서 튈 수밖에 없다. 정재영은 “좀비물 중에서 12세 관람가는 우리가 전세계 최초일 것”이라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정재영은 어리숙하지만 어딘가 순진한 준걸 역을 맡아 완벽한 충청도 사투리까지 소화했다.
“사투리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노력해도 외국어 같아요. 영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원어민이 들으면 바로 알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에요. 최대한 노력은 했는데 충청도 분들은 딱 아시겠죠. 개인적으로 장르와 상관없이 코믹한 대사자 장면에서 더 첨가하려고 하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웃기려고 해요. 그런 경우는 웃기면 다행이고 안 웃기면 웃기려고 한 게 아닌 척 하면 돼요(웃음) 작정을 하면 빠져 나올 수 없어요”
좀비 마니아답게 시나리오를 보면서 잠시나마 좀비 역을 탐낸 적도 있다는 정재영. 하지만 촬영에 돌입한 이후로 그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고 털어놨다. 좀비 역을 맡은 후배 정가람의 고생이 만만치 않았다며 “돈을 더 줘야 한다”고 선배로서 후배를 깨알같이 챙기기도 했다.
“일반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도 어려운데 있지도 않는 좀비를 연기한다는 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근데 이 친구는 되게 긍정적이라서 힘든 티를 낸 걸 못 봤어요. 사실 그 나이 또래 친구들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선배랑 얘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할 텐데 가람인 끝까지 남아 있어요. (이)수경이도 마찬가지에요. 걘 먹는 걸 좋아해서 단톡방에 음식 사진을 엄청 올려요(웃음). 나이차이가 꽤 나는데도 소통이 잘 됐어요. 애들이 착해서 잘 받아준 거죠”
연기 경력도 어마어마하지만 나이로만 따져도 20년 이상 차이가 나는 후배들이다. 정재영은 “후배들이 잘 받아주는 걸 착각하면 안 된다”며 나름의 눈치없는 선배가 되지 않는 비법을 전했다. 그렇다고 하기엔 류덕환, 양세종 등 그와 함께 작업을 해본 후배들은 정재영을 ‘좋은 선배’라고 극찬을 보내고 있는 상황.
“걔네들이 아는 선배가 나밖에 없나 봐요(웃음). 무게는 잡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죠. 그건 억압이에요. 특히 우리같은 일을 하는 분들이 제일 먼저 깨야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같이 연기하기 부담스럽죠. 같이 연기하는 후배들이 편해야지 나 혼자만 편한 건 의미가 없어요. 나 어릴 때만 해도 연극계에 위계질서가 세고 그걸 자랑스러워했어요. 이해가 안 가는 것 중 하나였어요. 가장 자유롭고 없어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젠 거의 없어졌어요. 아주 잘 된 거죠. 가람이나 수경이 같은 젊은 배우들도 구김살 없고 위축되지도 않아요”
■ “드라마 하면서 성실해졌어요”
줄곧 영화계에서 활동을 해왔던 정재영을 스크린에서 한동안 볼 수 없었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 등엔 출연했지만 상업영화에선 거의 보기 힘들었다. 그 사이에 정재영은 ‘어셈블리’ ‘듀얼’ ‘검법남녀’ 등 드라마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드라마 쪽에서 더 많이 들어와요. 예전에 겁이 많이 났거든요. 영화를 먼저 시작해서 드라마는 잘 모르는 곳이었고 주변에서도 잘 못하면 다 뽀록난다고(웃음) 신인도 아닌데 연기 못한다고 욕 먹을까봐 걱정했어요. 근데 한 번 해보니까 오히려 반성 많이 했어요. 그동안 영화는 편했구나 생각도 들고요. 드라마 하면서 성실해졌어요. 술도 끊었어요. 싫증도 잘 내지만 새로운 걸 겁내는 스타일인데 해보니까 되더라고요. 너무 겁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제 드라마 시스템에 익숙해진 정재영은 시즌제 드라마까지 탄생시켰다. 작년 출연했던 드라마 ‘검법남녀’가 호평을 받았고 올해 시즌2 방송이 확정됐다.
“개인적으론 의외였어요. 영화 시리즈는 한 번도 못해봤는데 드라마로 하네요. 사실 길게 작업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검법남녀’는 이야기가 연속되는 게 아니라 매주 사건이 정리되니까 짧은 영화 찍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질리지 않아요. 또 드라마는 반응이 바로바로 오니까 재미있어요. 찍는 입장에서도 생동감이 있어요”
아무래도 영화는 흥행이라는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재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정재영의 출연작인 ‘김씨표류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개봉 당시엔 흥행 실패했지만 ‘김씨표류기’는 세월이 흐른 후 재개봉을 원하는 관객들이 생길만큼 다시 평가를 받았다.
“배우는 촬영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개봉할 때 불행해요. 평이 안 좋으면 속상하죠. 그렇지만 엎질러진 물이고 홍보를 하면서 배우가 만회를 해야죠. 그게 배우의 의무가 아닌가 싶어요.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요. 보시는 분들이 잘 보셔야죠. 그래도 내가 몸 담았던 작품이니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죠. 아쉬운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가족을 버릴 순 없잖아요. 공부 잘 하는 애만 키울 순 없어요(웃음)”
이번 ‘기묘한 가족’은 독특한 설정에 신선하지만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음을 정재영도 인정했다. 하지만 '김씨표류기'가 재평가를 받았듯 '기묘한 가족' 역시 속단하기 이르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정재영은 자신이 색달랐던 영화의 이야기에 끌렸듯 관객들도 한국적 좀비가 주는 매력을 알아봐 주길 바랐다.
“이전 좀비 영화와는 다른 신선함이 있죠. 그래서 나도 선택을 한 거예요. 외국에서도 좀비 코미디가 크게 성공하진 못했거든요. 좀비는 허구니까 대중적으로 정착된 다음에야 코미디도 할 수 있죠. 그래서 이민호 감독도 준비하는 데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우리 영화를 보고 해외에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