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월스트리트' 여의도 금융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 다시 한번 살펴야 할, 중요하나 우리가 놓친 이슈들을 '왜(why)'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고려아연 지분율 변화도(자료=키움증권)
또 한번 자사주의 마법이 일어났습니다. 최근 고려아연의 LG화학, 한화와의 자사주 맞교환 이야깁니다. 고려아연 등 3사는 돈 한푼 안들이고 아군을 얻었고, 경영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습니다.
기업간 지분을 맞바꾸는 '자사주 맞교환'이 사실 흔한 일은 아닙니다. 교환과 동시에 의결권이 부활하는 자사주 특성상 기업 지배구조에 어떤 변수가 될 지 모르거든요. 때문에 확실한 신뢰, 담보 없이는 하기 어려운 결정입니다.
고려아연은 최근 보유 중이던 자사주 119.6만주(지분율 6.0%, 약 7668억원)를 활용해 총 5곳의 전략적투자자(SI)와 재무적투자자(FI)를 확보했는데요.
일단 SI는 2곳입니다. 고려아연은 LG화학에 2%(2576억원) 자사주를 주고 LG화학의 자사주 0.47%를 받기로 했습니다. 한화에는 1.2%(약 1568억원)를 주고 한화 자사주 7.3%를 받습니다. FI는 3곳입니다. 글로벌 원자재 트레이딩기업 트라피구라(Trafigura)와 한국투자증권, 모건스탠리인데요. 트라피구라는 고려아연 자사주 1.5%를 2025억원에 인수키로 했습니다. 또 한국투자증권에는 자사주 0.8%(1045억원)를, 모건스탠리에는 자사주 0.5%(653억원)를 넘기고 총 1698억원이 자금을 고려아연은 유치했습니다.
고려아연은 이번 결정과 관련해 "사업제휴 강화를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이라고 밝혔습니다. FI 선정에 대해서도 "중장기 투자자로서 투자의향과 납입능력 등을 고려했다"는 입장입니다.
일단 증권가에선 고려아연의 2차전지 소재산업 진출을 반기는 분위기인데요. 표면적으로는 이번 자사주 맞교환을 통해 고려아연이 글로벌 배터리시장과 수소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LG화학과 한화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한 점에서 중장기적으로 긍정적이란 평가가 나옵니다. FI에 대해서도 고려아연 성장성을 긍정적으로 판단한 든든한 지원군이란 해석입니다.
그럼에도 공공연하게 알려진 고려아연의 속내에 대해선 다들 공감합니다. 즉 최윤범 고려아연 부회장 일가의 장형진 영풍 회장의 경영권 개입에 대한 맞대응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앞서 재계와 증권가에선 지난 8월 유상증자 전후로 장 회장과 최 부회장간 갈등 속 지분경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이어져 왔습니다.
사실 자사주란 게 매입후 소각이 이뤄져야 주주환원의 의미가 배가되는 것이긴 하나 항상 그렇게 활용된 것은 아닙니다. 기업분할시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백기사를 통한 의결권 강화 용도로도, 기업 인수의 유용한 방법으로도 쓰여왔던 게 현실입니다.
다만 이 같은 기업의 이기적(?) 자사주 활용이 일반 소액주주 입장에서의 주주가치 희석으로 돌아온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최씨 일가는 지난 8월 유상증자에 이어 이번 자사주 교환으로 약 10% 수준의 주식 수를 늘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당 가치를 10% 희석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3개 그룹 모두 돈 한푼 들인 것 없이 최씨 일가는 장씨 일가와 3% 남짓 격차의 '대등한' 지분율을 갖게 됐습니다.
사실 주주입장에선 자사주를 소각해야만 유통주식수가 줄고 주당가치도 올라서 이익입니다. 매입후 소각해야 의미가 배가되는 자사주. 하지만 고려아연의 선택지는 역시나 경영권 방어였다는 점입니다. 주주가치가 희석된 것은 LG화학, 한화 주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결정으로 우려되는 점도 몇가지 있습니다. 우선 많은 상장사들의 자사주 활용에 대한 이기적인 스탠스입니다. 이번 고려아연의 자사주 맞교환처럼 주주가치 훼손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선 신사업 진출, 성장 모멘텀 확보를 이유로 호평해주기만 한다면 기업들은 더더욱 자사주를 소각할 이유를 찾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최근 상당수 기업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 같은 행태가 이어질 가능성이 한층 커질 수 있습니다.
당장의 주주가치 희석 이슈도 문제지만 우호지분을 갖는 백기사에 대한 편의 제공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고려아연이 사업제휴를 이유로 혹시 LG화학이나 한화에 단가를 낮게 책정해 원재료를 납품, 공급하는 건 아닐까란 합리적 의심입니다.
일각에선 한투와 모건스탠리 등 FI와의 이면 계약 가능성도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옵니다. 예컨대 경영권 방어를 위한 백기사에 대해 고려아연이 향후 일정기간 뒤 높은 이자를 붙여 되사주는 풋백옵션 등을 하지 않았겠느냐란 의심인 것이지요.
지난 8월 유상증자에 이어 고려아연의 추가 유증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견을 전제로 한 애널리스트들의 추측이긴 하나 지난번 한화처럼 앞으로 고려아연의 LG화학을 대상으로 한 유증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최 부회장 측이 여전히 부족한 지분을 늘리려면 추가 매수가 필요한데 현재로선 증자를 통해 풀어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2차전지라는 성장엔진을 단 자사주 맞교환 호재가 발표된 직후 고려아연 주가가 급락한 것 역시 이 같은 우려를 염두에 둔 기관 매도였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경영권 분쟁에서 이기려고 돈 한푼 안들인 자사주 맞교환으로 인해 주주가치가 훼손됐음에도 2차전지 테마주로 인식하고 박수를 치는게 우리 한국 증시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번 자사주 맞교환을 두고 전해온 일부 시장 관계자들의 전언인데요. 고려아연의 이번 결정이 때마침 주주환원에 물꼬를 트고 있는 기업들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동인만은 되지 않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