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영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왼쪽)과 이세훈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위메프·티몬 판매대금 미정산 관련 관계부처 TF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2024.7.29(자료=뉴스1)


“의료개혁에 비하면 조용히 잘 마무리된 걸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지난해 5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보험개혁회의’ 출범을 선언했을 때 시장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분위기였다. 보험업계의 고질적 난맥상이 드디어 해소되리란 기대감 못지않게, 개혁 기치로 내건 ‘신뢰회복’과 ‘혁신’이 말처럼 어디 쉽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그로부터 약 11개월이 지난 현재, 금융당국 모 인사의 말처럼 보험개혁은 조용히 잘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특히 비슷한 시기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깊은 상처와 불신만 남긴 채 원점으로 돌아간 의료개혁과 비교하면 분명 성공적이라 평가할 만하다. 이런 상반된 결말은 어디서 기인한 걸까.

가장 큰 차이점은 결론을 정해놓지 않은 ‘과정의 디테일’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 2월 민생토론회 형식을 빌어 발표한 의료개혁 ‘4대 정책 패키지’는 결론이 이미 정해진, ‘톱다운’ 방식의 일방적 통보에 가까웠다. ‘응급실 뺑뺑이’ 등 필수의료 붕괴의 핵심 원인이 의료인력 부족 때문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개혁의 주체(파트너)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는 개혁을 할 때 정책 설계자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인 금기 사항이다.

반면, 보험개혁에선 일부 민감한 이슈의 경우 1년여가 지난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보험 판매수수료 개편방안이 대표적이다. 보험영업의 핵심 축인 설계사들 수익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측면에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개혁 과제다. 금융당국은 성급히 결론을 내기보다 대략적인 개혁 방향을 먼저 제시한 후 설명회 등 업계로부터 충분히 의견을 수렴한 후 최종 방안을 확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보험판매전문회사 도입, 방카슈랑스 규제 완화, 소액단기보험사 활성화 등도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여전히 의견 수렴 중인 개혁 과제다.

의료개혁에 비해 보험개혁에는 정권 차원의 큰 힘이 실리지도 않았다. 5월 킥오프 회의 직후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교체됐고, 이복현 금감원장은 실세 기관장답게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았다. 학자 출신인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이 총괄 책임을, 금융위 권대영 사무처장과 금감원 이세훈 수석부원장이 실무 책임을 각각 맡은 배경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런 ‘힘 빠진 세팅’이 개혁 추진에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통령과 용산 참모들이 고삐를 꽉 움켜쥔 의료개혁과 달리 보험개혁은 실무자 중심의 효율적, 합리적 의사소통 분위기가 시종일관 유지됐다는 것이다.

결론이 정해지지 않은, 바텀업 방식으로 당국이 개혁 시스템을 세팅한 점은 ‘신의 한수’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보험개혁회의 발족에 앞서 두 달 동안 사전 이슈조사를 충분히 실시했고, 이에 근거해 주요 과제별로 5개 실무반을 구성했다. 각 실무반에는 당국자뿐만 아니라 연구기관, 유관기관, 협회, 보험사 등 이해 당사자들의 참여를 보장해 개혁을 ‘함께 만들어가는’ 모양새를 갖췄다. 60개 이상의 개혁 과제를 약 1년에 걸쳐 한 달씩 시차를 두고 발표해 현장 충격을 분산시킨 점도 갈등을 완화하고 조정하는데 도움이 됐다. 축구에 비유하면 공이 자기 진영 수비수부터 상대편 진영의 공격수까지 전달되는 ‘빌드업’ 과정이 체계적이고 깔끔했다는 얘기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들 한다. 혁명은 반대 진영을 힘으로 제압하면 그만이지만 개혁은 그렇지 못하다. 끝까지 설득해야 한다. 설득에 실패하면 성과도 없다. 그래서 개혁 과정은 아픈 아이를 다루듯 조심하고 섬세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속담이 행정가와 개혁가들 사이에서 괜히 자주 회자되는 게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금융당국이 권대영과 이세훈이라는 ‘디테일 능력자’를 보유한 점은 금융시장이 작은 위안거리로 삼을 만하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임에도 전문 관료와 시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한 리더십을 보여준 김소영 부위원장 또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비단 물리학에만 통용되는 법칙은 아닐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수시로 금융·경제 위기들이 몰아쳤고, 그때마다 관료들은 밤을 지새우며 위기 극복을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박봉에도 책임감 하나로 청춘을 바쳤고, 이런 순수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모여 후배들에게 시스템으로, 문화로 전수됐다. 이번 보험개혁 과정에서도 많은 후배 관료들은 선배의 섬세한 디테일을 배우고 익혔을 것이다. 이런 에너지 선순환 과정이 대한민국 금융시장 안정과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의료·연금·노동·교육 4대 개혁을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윤 전 대통령의 개혁에 대한 자질과 역량은 함량 미달 정도가 아니었다. 섬세한 디테일은커녕 방해되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버리려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4대 개혁 어느 것도 성공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특이하게 보험개혁만은 무탈하게 성공의 언저리에 근접해 가고 있다.

두 달 뒤 새 정권이 들어서면 다시 4대 개혁, 5대 개혁을 입에 올릴 것이다. 본격적인 개혁 추진에 앞서 윤석열 정부의 보험개혁 케이스를 반드시 연구해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