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NEW 제공
박해준은 무늬셔츠가 잘 어울린다. 영화 ‘힘을내요 미스터리’의 잔잔한 G무늬도, ‘무명인’의 큼지막한 꽃무늬도. ‘화차’나 ‘4등’에서처럼 앞머리를 내려도, ‘독전’에서 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내도,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와 같이 캡모자를 써도, ‘미씽: 사라진 여자’나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처럼 삭발을 해도 훈훈한 외모는 다르지 않다.
스크린 속 배우 박해준의 눈에는 선과 악, 무엇이든 담긴다. 영화 밖 그의 눈은 송아지 눈망울에 선함이 가득하다. 극중 인물의 됨됨이에 맞춰 말의 속도가 느리게도 빠르게도 달리지만 사람 박해준의 말투는 느릿느릿 생각 많은 거북이 같다.
서울 삼청로 카페에서 만난 그에게 쏟아진 기자들의 궁금증은 다양했지만 세 가지에 대해선 질문이 거듭됐다. 줄곧 악역으로 내닫던 그가 1차 독기를 빼고 ‘유열의 음악앨범’, 2차로 좀 더 빼고 ‘힘을내요 미스터리’를 선택한 배경, 연극배우 시절부터 영화 ‘화차’까지 썼던 박상우라는 본명 대신 박해준이라는 예명을 쓰게 된 계기, 그리고 ‘한예종 장동건’이라는 수식어에 관한 에피소드.
마치 수학에서 ‘순서도’를 그리듯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전달한 말들을 통해 배우 박해준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가 볼까.
# “부끄러워서 어디다가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네요. (무심히 머리를 만지며) 계속 안 잘라서….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 옷은 정해인 스타일로 입었습니다”
- 테이블을 뺑 둘러앉은 기자들을 보고 멋쩍어 하는 박해준. 제법 길어진 머리가 차기작을 위한 것인지 묻자 심드렁하게. 인터뷰 차림이 좋다는 칭찬에 ‘유열의 음악앨범’ 정해인을 소환하며 쑥스러움을 회피.
# “그냥 편하게 제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코미디에 대단히 소질 있는 것 아니고 상황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해 보고 싶은 마음. 그전엔 스타일이 있었다고 하면 힘 빼고 연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제일 크죠. 어느 순간에 센 역할 할지 모르겠지 그때는 좀 더 사람의 본성을 건드리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 기존 작품보다 사람 박해준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라는 ‘힘을내요 미스터리’의 영수. 힘 빼고, 스타일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기하고픈 갈망이 있어 택한 작품. 나의 본질을 투영해 연기한 만큼 다음에 악역을 다시 하더라도 인물의 본성을 건드리는 표현을 하게 되리라, 오늘보다 나아진 내일의 나를 기대하는 모습에서 보이는 순수.
# “칼국수 집의, 그 둘째아들의, 그 상황 상황에 집중해서 (영수를 연기했어요). 그 상황만 따라가면 성격이 나올 수 있겠다. 주어진 대본대로 갔어요, 특별히 성격을 만들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만 요렇게 해 보고, 조렇게 해 보고, 이건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물었죠. 제가 원래 감독님하고 그렇게 작업하는 게 좋아요. 명확히 만들어 가기보다 감독님과 현장에서 상의하며 조금씩 변화를 만드는 게 좋아요. 정확히 만들어 가면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걸 잊을 수 있거든요”
“영수가 어떤 성격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보시는 대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몇 가지 설정들은 있는데. 딸(류현비 분)과의 관계, 와이프(전혜빈 분)와의 관계, 사돈어른(김혜옥 분)과의 관계, 동네스포츠센터 길강 선배님과의 관계. 전사들이 이 캐릭터를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해요. 영수는 끝까지 집요하게 독을 품어서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아니라 그때 그때 이해가 되면 수긍하기도 하고, 불의를 보고 화냈다 확 접기도 하는 인간적인 인물 정도”
“영수와 제가 닮은 점은 많죠. 소주 좋아하고. 그런 부분은 없어요, 소리 지르고 짜증내는 것, 평소 하고 싶었던 욕망이었던 것 같고. 평소 하고 다니는 모습도 비슷해요, 편하고 자연스럽게 입고 다니는 모습. 사람들 별로 의식 안 하고 편한 거 좋아해서 동네 왔다 갔다 하는 거. 어쨌든 많이 비슷해요. 그냥 저 자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저라고 생각하시면) 좋진 않은데(웃음)”
- 아, 배우 박해준은 인물을 이렇게 만드는구나. 시나리오에 없는 인물의 과거사를 상정하고 그를 통해 주변인물과의 관계를 이해한 뒤, 대본을 따르되 현장의 공기를 담아, 최종적으로 감독과의 상의 속에 장면의 표현에 대해 다양한 버전을 시도하며. 여배우들에 대해선 배역으로 언급, 안길강 배우에 대해선 실명으로 얘기했다.
# “사실 영수가 저와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게 (영화 ‘독전’의) 박선창은 감옥에 있었어야지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요. 선창은 저기 안에 있는 욕망 같은 걸 끄집어내서 보여드린 거니까. 그래서 편한 것도 있어요, 법적으로 제재 받지 않으니까, 영화적 표현이니까. 현실에선 절대 안 되는데 영화 조건을 만들어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자유를 누려본 것이긴 한데, 배우로서”
“영수 같은 선한 연기가 편하긴 한데 동시에 어려운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더 자연스럽게 해야 하잖아요, 템포도 있어야 하고. 인간적으로 내가 많이 보이는 역할들이라 부끄럽기도 하고. 하는 마음은 편한데, 그런 것들이 불편해서 연기가 어려운 면도 있더라고요. 어떤 부분에선 선창이나 영화 ‘악질경찰’의 태주가 더 쉬울 때도 있는 거죠. 인물 안으로 들어가면 그 상태가 명확해서 더 선명하게 연기할 수 있어요. 영수는 물 흐르듯이 흘러가야, 그 상황을 내가 충분히 즐겨야 나오는 부분이라 어렵고요. 악역과 선한 인물 표현에 그런 장단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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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악질경찰’이랑 ‘독전’을 연달아 연기했어요. 개봉은 시기가 있게 나왔지만요. 그 뒤로 그런 작품을 받았을 때 ‘하, 또 해야 돼?’. 뒤늦게 후유증이 오더라고요. 그 현장에서 (악한) 마음 가졌던 게 후유증이 없지 않더라고요, 좋은 기분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놈이 아닌데 잘했다는 표현 해 주시면 감사하면서도 ‘뭘 잘했다는 거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피 터지는 잔인한 것에 대해 잠깐 고민한 때가 있었다는 거죠. 앞으로는 고심해서 해야 되겠다 생각했고, 그래서 ‘힘을내요 미스터리’를 하게 됐다 싶어요”
“(연극) 공연을 할 때 약간은 허당이고 약간은 지금 (영수)같은 캐릭터들을 많이 해서 사실 이런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너무 고마운 거는 ‘화차’ 때부터 악역으로 주욱 왔던 게, 별로 연기도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 센 캐릭터를 했는데 ‘저 친구는 연기 잘하잖아’ 소리 듣는 게 너무 고마운 일이어서였죠.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원래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있었고. 영수 캐릭터를 만났을 때 ‘그래, 지금 보여 줘야지!’ 반가움이 있었어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배우구나를 보여 줄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이잖아요. 배우는 계속 다른 모습이 필요해요”
- 악역 연기 잘한다는 칭찬이 고마운 배우. 동시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고민하는 사람. “허당에 선한 인물도 연기할 수 있는데” 때를 기다린 박해준.
# “악역에 대한 욕심. 욕심은 있는데. 아직은 ‘더 극한으로 가보는 것’에 대한 욕심은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악인을) 보고 싶지 않아요, 영화 보면 ‘아우 잔인하다’ 하죠. 혹시나 (관객으로서) 일부러 자극적인 영화를 보는 건 좋지 않은데, 저는 제 역할에 충실하게 하는 것 같아요. 기회가 있으면 또 하고 싶어요”
- 고심 속 숱한 악역을 지나 선한 인물로 방향이 바뀌었음에도 다시 악역을 하고 싶을까? 대답은 Yes.
# “(일상의 악에서 인간미 넘치는 선까지 연기한) 지금부터가 중요한 때인데, 지금 시기가 제일 잘해야 되는 때다 느껴지는데. 근데 지나고 나면 또, 그때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책임감 있는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 크든 작든 하나의 변곡점을 지나면, “지금이 제일 중요한 때”라는 생각이 밀려든다. 다른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잘해야 한다는 각오가 솟는다.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늦추지 않는 배우들은 그렇게 ‘신발 끈 고쳐 묶는 때’가 계속 온다. 마음을 편히 내려놓을 때가 없다. 자신만의 그래프, 현재의 좌표에 대한 확인을 잊지 않는 배우에게 내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