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오기출 푸른아시아 상임이사>
2022년 9월 6일 포항제철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물에 잠겼다. 슈퍼태풍급 '힌남노'로 하천이 넘치면서다. 물에 잠긴 후 단 두달동안 포항제철이 입은 매출 손실은 산업통상자원부 추산 2조 400억원에 달했다. 포항제철 납품 기업들 피해 금액(2500억원)을 합산하면 최소 하루 380억원씩 손실을 본 셈이다.
포스코에 불어닥친 기후 재앙은 투자 위기로 이어졌다. 최근 15개 유럽 소재 기관투자자들은 '기후 대책 미비' 등을 이유로 포스코홀딩스와 자회사들을 투자 대상에서 배제했다. 네덜란드 자산운용사 로베코는 포스코가 석탄을 단계적으로 폐기하는 계획을 세우지 못하자, 기후 기준 미달로 투자를 회수한다고 밝혔다. 25년 동안 포스코와 전략적 제휴 계약을 맺었던 일본제철마저 포스코홀딩스의 지분 3.42%를 1주도 남기지 않고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외국인의 투자 회수로 포스코홀딩스의 외국인 지분율은 2022년 9월 54%에서 1년만에 28%로 급감했다.
'기후는 기업에 리스크로 작용하므로, 대비 못한 기업의 투자금을 회수한다'
투자자들의 셈법은 간단하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코의 결정은 무엇일까?
"포스코가 탄소중립을 달성하려면 370만 톤의 그린수소가 필요한데, 한국에서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린수소를 제공할 나라로 이전하는 것을 최후의 수단으로 숙고하고 있다."
지난해 9월 24일 포스코의 탄소중립 담당인 김희 상무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탈한국' 선전포고다.
과거에는 '기후 행동'이 '정의로운 행동' 정도로 인식됐다면, 이제는 '기후'가 '자본주의'의 근간을 바꾸고 있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기후'에 예민해 진 건 바로 '돈' 때문이다. 전 세계 거물급 투자기관들이 '기후영향공시'를 원하는 이유다.
국제환경단체 클라이밋액션 네트워크가 발표한 기후변화대응지수 63위/64개국 국가이자, 세계 기후 총회 선정 2년 연속 '오늘의 화석상' 수상자인 '기후 악당' 한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기후변화'를 '자본주의'의 티핑포인트로 지목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오기출 푸른아시아 상임이사를 지난 21일 만나 한국의 기후 대응 현주소를 물었다. 오 대표는 지난 23년간 유엔과 협력하며 국제 기후위기 현장에서 활동하며 ESG 지침 개발에 참여했다. 2014년에는 유엔환경노벨상으로 불리는 ‘유엔생명의토지상’ 최고상을 수상했다.
지난 20일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기후공시의무화법' 대표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강훈식 의원실
-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미국에 상장한 기업 모두 '기후영향공시'를 해야 한다는 새 규칙을 만들면서, 2026년부터 미국에 상장한 기업들은 기후로 인한 영향과 대응 전략을 공개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지난 20일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후공시의무화법'을 발의하면서 물꼬를 텄다.
= 현재 논의되는 '기후공시'는 휴대전화로 치면 '기후 공시앱'을 언제 설치할지, 어떤 기업들이 설치할지 등을 논의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문제는 앱을 구동시키는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앱을 깔아도 구동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국제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목적성, 완전성, 투명성, 신뢰성을 갖춘 '공식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국제 사회에 수출도 하고 투자를 받아야 하기에 공시를 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한국에는 공식 프로그램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불완전하다고 보는 것이다. 혹은 이러한 엄격한 프로그램 설치를 연기하고 싶은 것이다. 글로벌 기준에 맞는 프로그램의 개발도 없이 공시를 추진할 경우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기후 공시앱'의 공식 프로그램인 '글로벌 온실가스 산정과 보고 프로그램'을 한국 실정에 맞게 개발하고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이런 일에는 상당히 시간이 필요하다.
- 국내 공시한 내용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려면 어떤 지침을 따라야 하는가?
= 세계자원연구소(WRI)와 세계지속가능기업위원회(WBCSO)가 공동으로 제정한 온실가스 측정·보고·검증을 위한 글로벌 표준인 '온실가스 프로토콜(GHGP, Greenhouse Gas Protocol)'이 있다. GHG 프로토콜은 국제회계기준(IFRS)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유럽연합 탄소국경조정제도 기준인 유럽연합탄소배출권거래제(EU ETS), RE100 등에서 온실가스 관련 '리딩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중 92%가 사용하는 지침이기도 하다. 그동안 1000여개에 달하던 ESG 지침이 세계에 있었는데, 기후와 온실가스 표준은 GHG 프로토콜 하나로 통일되고 있는 것이다.
- 한국도 GHG 프로토콜에 따라 공시 지침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 푸른아시아는 지난 2월 세계자원연구소와 GHG 프로토콜의 한국어 번역과 관련한 12개 조항의 계약을 체결하고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앞으로 GHG 프로토콜 표준과 지침의 한국어 번역과 출판은 푸른아시아가 공식적으로 맡게 된다. 번역을 마친 후 국내 산업 구조에 맞게 산업별로 지침을 개발하는 과정이 추가로 필요하다.
- 그럼 앞으로 GHG 프로토콜에 맞게 기후영향공시를 준비하고, 기업들도 ESG 체계를 점검해 나가면 되는 것인가?
= 안타깝게도 한국은 현재 표준과 지침 개발에 뒤쳐져 있다. 뒤쳐지기만 한 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K-ESG나 K-RE100을 만들어서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지침을 만들고 보급하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반도체 한 분야에서만 한국 실정에 맞는 GHG 프로토콜 지침을 개발하는데 3년이 소요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정부는 3개월 만에 'K-지침'을 만들고 한국 기업들에게 따르라고 한다.
지난 세계자원연구소와 푸른아시아 회의에서 세계자원연구소 측이 "한국이 K-ESG를 만들었다는데 왜 만들었느냐"라고 묻더라. 글로벌 지침을 따르던가 국내 지침을 만들더라도 글로벌 지침과 일치해야 하는데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탄소거래제를 예로 들면, 한국은 유럽 측에 편지를 보내 "우리도 유럽과 유사한 탄소배출권 시장과 지침이 있으니 이걸로 탄소국경조정제를 면제해달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탄소배출권거래제는 유럽연합의 체계와 전혀 다르다. 이러한 'K-지침'을 수용할 나라나 글로벌 기업이 있을까? 이렇게 글로벌 기준을 수용하는 것을 뒤로 미루는 것은 우리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골든타임을 허비하는 것이다.
SK 등 한국 기업이 주도하려는 자발적 탄소 시장도 국제적으로 신뢰받기는 어렵다. '데이터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기후 데이터를 인정 받으려면 목적성, 완전성, 투명성 등을 담은 국제 지침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 다른 국가들은 어떤가. 그동안 중국이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세를 반대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8월 2일 중국 정부 합동으로 '탄소에 대한 이중 통제' 정책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중국 정부가 중국 산업의 탄소집약도를 제도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인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중국은 일찍이 GHG 프로토콜 체계를 구축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후진적인 수준이 아니다. 중국의 기후 정책을 설명하려면 중국이 추진하는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라는 새로운 국제협력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는 개도국에 대한 빈곤 저감, 기후변화 대응, 청정에너지를 지원하는 협력체다. 이 협력체는 스마트 제조업, 녹색 제조업 등 산업화를 함께 지향한다.
시진핑 주석은 2021년 11월 아프리카 협력 포럼에서 53개 아프리카 국가에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고, 2022년 11월 아세안 정상회의에서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60개 이상의 나라들이 여기에 가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은 과학과 기술, 글로벌 협력체를 통해 유럽연합들이 추진하는 녹색무역전쟁에 대응하는 해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유럽의 탄소국경세에 반대하고 있지만 내적으로 유럽연합 기준을 맞춰 탄소국경세를 대비해 왔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필사적인 전략이다.
일본의 경우, 그동안 기후 대응보다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면서 자국 산업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탄소중립 이행과 탄소국경세 대응에 소극적이었다. 지금의 한국과 같았다. 그런 일본이 최근 대담하고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2023년 7월 8일 일본 정부는 화석에너지에서 청정에너지로 산업과 사회구조를 전환하는 '녹색전환 추진 전략'을 발표했고, 세계 최초로 향후 10년간 20조엔(약 185조원) 규모의 녹색전환 채권 발행을 결정했다.
중국, 일본, 유럽연합이 만들고 있는 '글로벌 녹색 장벽'의 목표는 자국 제조업 보호에 있다. 중국과 일본은 정부가 기후공시를 주도하고 있고, 그 기준은 GHG 프로토콜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5년 동안 한국이 2030년까지 달성해야 할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치인 2억 톤 중 25%에 해당하는 약 5000만 톤만을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나머지 75%에 해당하는 1억 5000만 톤은 차기 정부가 3년 동안 해결하라고 떠넘긴 것이다. 이대로라면 다음 정부, 다음 세대가 져야 할 위험이 너무나 커진다.
- 기업 ESG 담당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명함만 ESG로 되어 있고, ESG는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업과 정부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 네덜란드 자신운영사인 로베코가 2023년 국부펀드, 모태펀드, 연기금 등 300개의 투자기관을 조사한 결과를 보자. 자산규모를 합치면 지구촌 GDP의 30%에 해당하는 27조 달러 규모를 운용하는 300개 투자기관에서 2023년 투자전략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기후와 생물다양성(71%) ▲생태계 보존(48%) ▲사회적 경제의 정의로운 전환(48%)이었다. 2년 후인 2025년에는 이 수치가 더 올라갈 것으로 예상했다. 투자자들이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다. 기후와 생태계, 생물다양성 문제들이 투자자들에게 있어 가장 큰 '리스크'로 떠올랐다는 뜻이다. 기후위기는 이제 기후 운동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이야기라는 점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기후'에 따른 자본주의의 변화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불가역적인 변화로 볼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유독 '가격 효율성'을 따지는 성향이 강하다. 당장 돈이 안되면 ESG도 뒷전이다. ESG를 제대로 안하면 무역과 투자가 막혀 이제 돈을 못 버는 시대가 온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기업은 기후위기에 대해 '이중 중대성'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너희 기업이 기후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와 더불어 '기후위기가 너희 기업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 두가지 측면이다. 과거에 무역은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을 만들면 수출이 성립됐다. 앞으로는 탄소국경세 때문에 기후위기에 대비가 안된 기업은 가격이 오르는 등 경쟁력이 떨어진다. 자본주의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자유무역질서에서 서구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했던 제조업 기업들이 기후 영향으로 다시 미국이나 유럽, 호주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첨단기업, 청정 기업 등 부가가치가 높은 기업들이 이동해 가는 것이다.
한국 기업도 예외 없이 떠날 수 있다. 이렇게 '기후' 때문에 기업이 떠나면 지역공동체는 위기에 처하고 지역공동체가 붕괴되면 주민들은 '기후 난민'이 된다. '기후 난민'이란 기후 문제로 재산을 잃은 사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포스코가 떠나면 포항은 기후 난민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국 정부와 산업계가 대비하지 않으면 기후 문제로 산업 공동화가 일어날 것이고. 지역의 주민들은 피해자가 될 것이다.
한국의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에 푸른아시아는 글로벌 온실가스 관련 산정과 보고 표준을 한국에 적용하기 위해 ‘한국 국가 프로그램’(KCP, Korea Country Program) 설립을 위해 2022년부터 세계자원연구소와 소통해왔다. 지난해 11월에는 세계자원연구소 아시아 태평양 책임자가 한국을 방문해 푸른아시아와 한국국가프로그램(KCP) 설립을 위한 협의를 진행했다.
향후에는 GHG 프로토콜 기반 온실가스 측정·보고·검증 전문가 양성을 위해 세계자원연구소와 소통하며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예정이다. 국가 전략적 차원에서 정부와 산업계, NGO들이 함께 협력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