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두산아트센터 제공
시작이 있으면 늘 끝이 따르는 법이다. 삶과 죽음 안에서도 수많은 시작과 끝을 마주하게 된다. 입학과 졸업, 입사와 퇴사, 만남과 헤어짐 등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시작이 되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장서영 작가는 11월 20일부터 12월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진행되는 ‘시작하자마자 끝나기 시작’을 통해 삶과 죽음 안에서 유한하게 살아가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장서영은 영상과 설치 작업에서 다양한 소재를 통해 인간이 가진 유한한 조건들을 상기시켜 온 작가로 알려졌다.
본격적으로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윈도우에 ‘천천히’라는 글자가 새겨진 직물이 전시되어 있다. 차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 문구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감히 짐작이 되진 않는다. 솔직히 이 윈도우에 전시된 작품이 작품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전시를 보기 전과 후에 이 작품을 보는 마음은 천지차이다.
‘시작하자마자 끝나기 시작’의 메인 영상 작품은 ‘슬립스트림’이다. 마치 차체가 인간의 몸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자동차 바닥에 깔린 시트와 유사한 소재로 전시장이 덮여 있고, 관람객들은 그 위에 앉아서 직접 차를 운전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혹은 차가 아닌 몸이 직접 도로 위를 내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제공
자동차 안에서 앞과 뒤의 유리로 바라보는 풍경과 더불어 네비게이션의 평범하지 않은 안내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관통하면서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의 삶을 바라보게 한다. 인간의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고, 평소에는 그 유한함을 잊고 있다가 신체에 닥치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그것을 비로소 인지하게 된다.
영상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사실을 관객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화창한 날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거나, 자동세차장에서 눈물인지 비눗물인지 모를 액체가 차체를 휘감는 모습 등 묘한 의미를 담고 있는 상황들이 닥친다. 특히 영상에서는 ‘해피엔딩’을 강조한다. ‘해피엔딩’이라는 말 그대로, ‘행복’을 알기 위해선 무언가가 ‘끝’이 나야 가능함을 인지하게 한다. 또 네비게이션 속 음성에 오류가 발생하면서 ‘끝’이 반복되는데, 이는 곧 ‘흙’으로 발음된다. ‘흙’은 ‘흑’이라는 울음소리 가득한 현장으로 바뀌기도 한다.
결국 이 영상은 주어진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누구도 그 시작과 끝을 피해갈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 한들, 허무함과 무력감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순간’의 시간에 유연하게 반응하면서 감각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비록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앞서 언급했던 윈도우 속 ‘천천히’라는 작품을 나가는 길에 다시금 천천히 살펴봤다. 아이러니 하게도 ‘천천히’라는 글자는 빠르게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서 포착된 형태였다. 우리는 시작과 끝이라는 순환 속에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 이번 장서영의 개인전 ‘시작하자마자 끝나기 시작’은 연말을 맞아 자신의 삶의 속도와 방향을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