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와 탄식. 누군가의 희열은 다른 이에겐 좌절이었다. 단숨에 자기자본 6조원대 압도적 1위 증권사 탄생 앞에 박현주 승리, 김남구 패배라는 평가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로부터 10년, 벌어질 것 같던 두 회사의 격차는 짜릿하리만큼 좁혀졌다. 연결기준이냐, 별도기준이냐에 따라 미래에셋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의 자기자본 1위 타이틀은 뺏고 빼앗긴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패자의 역전극인 셈. 불가능해보였던 추격전, 10년간 두 오너는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뛰어온걸까.
(사진=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1. ‘대우증권’ 삼킨 박현주
2015년 12월 28일 서울 포시즌호텔. 박현주 회장이 기자들 앞에 섰다. 창업한 지 불과 18년 만에 국내 1위 증권사를 삼킨 그는 승리의 기쁨을 굳이 감추려 애쓰지 않았다.
“새로운 그림을 그릴 겁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런 부분은 큰 꿈을 갖고 증명하겠습니다”
“한국 금융산업과 자본시장의 DNA를 바꿔보고 싶다”던 그가 “대우증권과의 합병을 통해 엄청난 케미스트리를 만들 것”임을 자신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박 회장 말대로 증권업계에선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브로커리지에 강점을 지닌 대우증권과 금융상품 판매에 특화한 미래에셋이 통합되면서 WM 부문의 포트폴리오는 무게추를 맞춰갔다. WM점포수만 170개에 달하면서 고객과의 접점은 넓어졌고 자산 확대 효과도 확실했다. 채권 발행 시장과 기업공개(IPO) 시장에서도 미래에셋으로선 엄두도 내기 힘들었던 선두를 쟁취하며 경쟁사들을 압도해갔다. IPO 파트를 포함한 일부는 미래에셋 출신과 대우증권 출신을 그대로 유지해 내부 경쟁을 유도하는 등 1위 타이틀을 거머쥔 박 회장의 경영 전략이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가 진짜 주목한 시장은 따로 있었다. “불가능한 상상”과 “Innovator(혁신가)”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박 회장은 글로벌 시장으로 직행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2003년 홍콩을 시작으로 진행돼 온 미래에셋의 글로벌 진출 계획은 명확했고 한결 같았다.
그동안 미래에셋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이 현지에 진출한 뒤 증권이 후발 진출하는 전략을 써왔다. 하지만 대우증권 인수로 상황은 바뀐다. 이미 해외법인에서 이익 구조가 마련돼 있던 대우증권의 법인들을 포함, 합병 이후 해외 법인은 총 14개로 늘었다. 박 회장으로선 자본 수혈을 통해 덩치를 키울 시장이 그만큼 넓어진 셈이었다.
행동도 빨랐다. 합병 법인 출범 전인 2016년 두차례에 걸쳐 뉴욕 법인에 대해 29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시행한 것을 시작으로 2017년 LA현지법인에 3억달러 규모의 증자를 실시했다. 기존 자기자본의 15배에 이르는 대규모 증자다. 같은 해 베트남법인과 인도네시아법인에 대한 증자를 포함해 2년간 실시한 증자규모만 4억달러를 웃돈다. 박 회장이 주목하고 있는 인도 시장에 현지 법인을 처음 설립한 것도 이 때다.
다만 국내 시장내 자기자본 활용 전략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계열사간 ‘일감 몰아주기’ 의혹으로 조사를 받게되면서 초대형 투자은행(IB)의 1호의 타이틀을 한국투자증권에게 뺏겼다. 발행어음 사업 진출도 발목 잡히며 시장 선점 기회도 놓쳤다. 박 회장은 즉시 7000억원의 유상증자를 통해 자기자본을 8조원대까지 늘리며 고삐를 당겼다.
(사진=김남구 한국금융지주 회장)
#2. 성장 무게추 맞춘 김남구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일찌감치 세웠던 ‘비전 2020(2020년 시가총액 20조원, 자기자본이익률(ROE) 20%)’ 달성을 위해 더없이 좋은 기회였기에 기대 만큼 쓰린 패배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심기일전'. 전체 사업부문의 고른 성장으로 수익성의 균형을 맞춰간다는 본연의 전략을 다잡으며 신발끈을 고쳐맸다.
2015년, 한국투자증권은 리테일 자산관리 패러다임 변화의 해로 선언했다. 눈 앞에서 놓쳐버린 인수합병의 기회로 경쟁사들과 격차는 벌어졌지만 개인고객 자산을 확대해간다는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브로커리지에 의존적인 한계를 벗어나 웰스 매니지먼트(WM)를 강화함으로써 ‘주말에 자고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 구조’를 만든다는 큰 그림 아래 움직였다.
지점 직원들의 핵심성과지표(KPI)부터 싹 다 바꿨다. 매매를 통한 수수료 수익이 아닌, 고객 자산을 증식시키는 직원에 대한 혜택을 대폭 확대했다. 하지만 의지만큼 속도가 붙지는 않았다. 2016년 11월, 한국투자증권은 1조692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통해 초대형 IB로 도약한 뒤 국내 단기금융업 인가 1호 타이틀을 얻으며 기업금융 부문에서 운신의 폭을 넓혔다.
2017년까지만 해도 한투증권은 브로커리지와 자산관리, IB 세개 축이 나란히 2000억원대 순영업수익을 기록했다. 하지만 자기자본 확충 효과가 가장 빨리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단연 IB였다. NH금융지주-우리투자증권, KB금융지주-현대증권 등 유례없이 이어진 증권가의 인수합병(M&A) 흐름을 타고 정부 역시 초대형 IB시장에 대한 혜택을 확대해갔다. 한국투자증권은 본연의 강점인 정통 IB를 중심으로 경쟁력을 키우면서 2019년 기업공개, ECM(주식자본시장), DCM(채권자본시장), 인수합병 금융자문 등 IB 전분야 톱3 타이틀을 싹쓸이하며 최고의 IB하우스라는 브랜드를 공고히 했다.
금융사 전반이 뛰어들었던 부동산 활황기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에서의 단맛도 봤다. 2018년 2782억원 수준이던 IB 순영업수익이 2021년 7131억원까지 폭증한 데에는 단연 PF 효과가 컸다. 자기자본을 국내 IB 시장에서 십분활용한다는 한투증권의 전략은 시장과 함께 큰 성장으로 이어졌다.
카카오뱅크 설립도 한국투자증권으로선 신의 한수였다. 은행 자회사를 보유하지 않고 있던 한국금융지주는 2017년 카카오뱅크 설립부터 출범까지 모든 작업에 공들이며 58%의 지분을 투자했다.
현재 한국투자증권은 카카오뱅크 지분 27.16%를 보유한 2대주주다. 지분법에 따라 전체 카카오뱅크 당기순이익에서 한국투자증권의 카카오뱅크 지분율 만큼 한국투자증권 당기순이익에 반영된다. 카카오뱅크의 성장이 한국투자증권의 수익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에 카카오뱅크 플랫폼과 연계한 신규 고객 유입 효과까지 감안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투자 성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