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장보다 조정…새 인사 트랜트로 떠오른 ‘현장을 아는 조정자
과거에는 계열사별 성과가 곧 그룹의 성과였다. 그러나 글로벌 수요 둔화, 고금리, 환경 규제, 지정학 리스크가 동시에 작동하는 국면에서는 이 공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특히 정유·화학, 중공업·소재, 통신·AI·데이터센터처럼 서로 다른 산업이 하나의 그룹 안에서 얽히는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중복 투자와 내부 경쟁, 규제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 역량이 핵심 자원이 됐다.
한 계열사의 투자 확대는 다른 계열사의 원가 부담으로 돌아오고, 내부 경쟁은 외부 시장보다 더 큰 비용을 만들어낸다. 규제와 사고 리스크는 특정 사업을 넘어 그룹 전체로 확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2026년 인사의 또 다른 축으로 ‘통합형 CEO’가 부상했다.
■ 복잡해진 포트폴리오,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질서
김종화 SK에너지 대표이사 사장은 SK이노베이션 화학사업 자회사인 SK지오센트릭 대표를 겸직한다. 정유–화학 밸류체인은 수요, 원가, 설비 가동률이 긴밀하게 연동된 구조다. 업황이 좋을 때는 분리 경영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석유화학 불황이 구조적으로 고착되면서 분리된 의사결정은 오히려 리스크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설비는 고정비로 남았고, 투자 판단은 엇갈렸다. 특히 SK지오센트릭이 울산 산업단지에서 NCC(나프타분해설비) 통합을 포함한 사업 재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유–화학 간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리더십의 필요성은 더 분명해졌다.
김 사장은 정유와 화학 사업을 모두 경험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엔지니어링, 생산, SHE, 울산CLX 총괄을 거치며 두 사업의 손익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취임 직후 “석유화학 업황 부진과 구조적 변화라는 큰 파고를 넘기 위해 새로운 OI(Operation Improvement)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정유·화학·중공업·ICT로 확산되는 통합 리더십
통합형 CEO는 오너 경영 복귀와는 다른 방식으로도 등장한다. HS효성은 그룹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전문경영인 회장 체제를 공식화하며, 김규영 전 효성그룹 부회장을 회장으로 선임했다. 오너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조정형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운 결정이다.
HS효성은 중공업, 소재, 신사업 등으로 사업 포트폴리오가 빠르게 복잡해진 상태다. 계열사별 성장 전략을 그대로 두기에는 투자 우선순위 설정과 리스크 관리가 점점 어려워졌다. 김 회장은 기술, 현장, 지주사 경영을 두루 경험한 인물로 그룹 내부 구조에 정통하다.
ICT 산업에서도 통합형 CEO의 필요성은 같은 방식으로 드러난다. KT는 통신 ARPU 정체, AI·IDC 투자 확대, 복잡해진 계열사 구조라는 세 가지 부담을 동시에 안고 2026년 CEO 인선을 단행했다. 여기에 대규모 해킹 사태라는 악재까지 겹쳤다.
차기 대표이사 후보로 선출된 박윤영 전 KT 기업부문장은 외부 혁신가가 아닌 내부형 리더다. 30년 넘게 KT에 몸담아온 박 후보는 B2B, DX, 기업 사업 전반을 경험하며 조직 내부 사정에 밝은 인물이다. 박 후보에게 주어진 과제 역시 성장보다 수습과 정렬이다. 해킹 사태로 흔들린 신뢰를 회복하고 정보보호 분야에 5년간 1조 원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구체화해야 한다.
통합형 CEO의 부상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규제 리스크는 계열사별 대응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내부 경쟁은 성과가 아니라 비용으로 작동하는 등 산업 구조 자체가 변했다. 글로벌 변동성이 커질수록 기업이 통제할 수 있는 변수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가 됐다. 이제 기업이 선택하는 리더는 함께 버틸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