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김선희 매일유업 대표, 허인철 오리온홀딩스 대표, 윤호중 hy 회장. (사진=각사)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한 가전업체가 광고에 사용했던 이 슬로건은 우리나라 광고사에 남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누구나 경험과 직관을 통해 이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이전에 경영자와 임직원은 수 많은 고민과 검토, 논의를 거듭한다. 그렇게 결행한 신사업 투자, 인수합병(M&A) 등 경영 판단은 10년 후 기업을 바꿔놓는다. Viewers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기업들이 지난 10년 전 내렸던 판단이 현재 어떤 성과로 이어졌는지 추적하고 아울러 앞으로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매출 3조·2조·1조. 10년 전 '한우물 경영'을 벗어던진 국내 식품업계 대표주자 오리온, 매일유업, HY의 지난해 성적표다. '본업 집중', '한우물 파기' 경영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당시, 이들의 외도는 '문어발 확장', '무리한 사업다각화'란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국내시장 장기 불황과 내수침체에 직면한 오늘, 보수성이 짙은 국내 식품기업은 술집이 뷰티사업에, 라면집이 건기식에 진출하는 등 정체된 시장 극복을 향한 신모델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다. '선택과 집중', 한 우물 파기'의 과거 성공방정식은 이미 옛말이 됐다. 식품업계 'N잡 열풍' 속 '외도'를 선택해 10년새 몸집을 불리는 데 성공한 오리온, 매일유업, HY은 'N잡러' 표본 모델이 되고 있다.

28일 관련업계 따르면 오리온홀딩스는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3조1952억원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3조 클럽'에 입성했다. 매일유업(매일홀딩스)도 2년 전 연결기준 매출 2조원을 처음으로 넘긴데 이어 지난해 전년보다 2% 성장하면서 2년 연속 '2조 클럽'을 유지했다. 같은 기간 hy 역시 매출 1조6826억원(+10.8%)으로 외형 확대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10년 전과 비교하면 더욱 빛이 난다.

2014년 오리온홀딩스, 매일유업홀딩스, HY 세 기업이 매출은 각각 2조2998억원, 1조4479억원, 1조2300억원으로 지난해 실적과 비교해 '5000억~1조원' 가량 외형성장을 이뤘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 역시 HY를 제외하면 2배가량 올랐다. 이 같은 흐름은 1분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오리온홀딩스의 올해 1분기 연결기준 매출은 10년 전과 비교해 약 2000억원 가량 성장했고, 이 기간 매일홀딩스는 영업이익이 3배 가량 뛰었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10년새 성장 정체가 심화되고 원가, 인건비, 임대료 등 고정비가 대폭 상승한 가운데 매년 한자릿수 영업이익률을 보이는 식품업계 특성을 감안하면 괄목할만한 수치"라며 "식품업계는 출산율 등의 감소로 인구 증가율은 정체됐는데 기업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한 분야만 잘해서는 앞으로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라고 말했다.

■경기침체·내수포화·소비절벽 위기에…'DNA'부터 뜯어 고쳤다

2014년 식품업계 신년사에는 일제히 '신사업'에 대한 도전의 단어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지속된 경기 침체와 내수 포화란 부정적인 영업환경에 더해 인구감소에 따른 '소비절벽론'이 식품업계 종사자들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대형마트의 '영업규제'는 식품업계의 매출 감소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국내 주요 식품업체들은 해외 무대를 돌파구 삼아 중국, 베트남, 러시아 등지로 진출을 확대했지만, 최대 수출국으로 꼽히던 중국은 이듬해 사드문제가 발생하면서 걸립돌로 작용한다.

이때 시각을 틀어 기업의 사업구조를 바꾼 곳들이 바로 오리온, 매일유업, HY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슷한 시기 새로운 사령탑을 맞았다는 점이었다. 2014년 오리온그룹과 매일유업은 각각 허인철 부회장과 김선희 부회장을 대표에 앉혔다. HY는 이보다 조금 앞선 2012년 윤호중 회장이 중심이 된 지배구조를 구축했다. 비슷한 시기 새로운 수장을 맞은 세 기업은 다방면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며 '한 우물'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성장 한계가 선명해지던 시기, 각사의 수장들은 저마다 사업다각화의 밑작업에 착수했고 십여년이 지난 현재 세 기업이 일군 성과에는 수장들의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혁신 전략가' 허인철, 과감한 '개혁'으로 바이오까지 눈독

신임 수장들은 각사가 안고 있던 고질적 문제부터 뜯어 고치기 시작했다. 우선 오리온은 과거 제과업을 중심으로 스포츠토토와 쇼박스 두개의 부업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2014년 안정적인 수익원이었던 스포츠토토 사업권을 반납면서 새로운 성장축 발굴이 절실해진 상황이었다. 이에 허 부회장은 취임 후 지주사 전환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핵심 축인 제과회사는 종합식품회사로의 변신을 추진하면서 신사업 진출을 위한 체질개선을 주도한다.

담철곤 회장이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허 부회장은 이마트 사장 시절부터 '혁신 전략가'로 평가받은 인물이었다. 허 부회장은 오리온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부터 거침없이 개혁에 나서기 시작했다. 제과사업에서는 취임 초기부터 지배구조 간소화와 비용 효율화를 추진하며 기초 체력을 다졌다. 2017년엔 각국 법인 별로 따로 구매하던 원부자재를 헤드쿼터인 한국법인 글로벌구매팀이 한꺼번에 통합 구매하는 방식으로 변경하며 비용을 낮추고 원자재 수급 안정성을 높였다. 이를 통해 전사 수익성 개선과 함께 시장 경쟁력 강화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2019년엔 세계적인 글로벌 식품기업 수준의 영업이익률인 15%를 돌파했다. 이후 오리온은 꾸준히 15%를 상회하는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허 부회장은 신사업 포트폴리오도 구축한다. 허 부회장의 신사업 핵심축은 음료, 건강기능식, 프리미엄 디저트, 바이오로, '제2의 탄생'을 선언한 이후 오리온은 식사대용식 사업과 음료 사업에 진출, 2018년 '마켓오네이처'를, 2019년엔 '닥터용암수'를 각각 선보인다. 덕분에 오리온홀딩스는 과거 제과, 스포츠토토, 쇼박스에 국한됐던 사업구조가 ▲제과 ▲영상 ▲지주 ▲기타로 다변화된다. 특히 신사업으로 분류되는 기타사업부분에는 음료사업 및 정보서비스업, 바이오 사업, 투자 및 무역업 등이 포함되면서 오리온이 '탈제과'를 완성할 차세대 먹거리사업들을 담는다.

특히 눈여겨 볼 사업은 '바이오'다. 오리온은 2020년 '글로벌 종합식품·헬스케어 기업 도약'을 목표로 설정하고 신사업 성장체제를 확립했다. 바이오사업은 간편대용식과 음료사업과 함께 오리온이 '3대 신사업'으로 육성중인 분야로, 현재 대장암 체외진단 키트, 결핵백신, 치과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한 임상 수행과 상용화에 주력하는 중이다.

■'재무통' 김선희, 오너 일가보단 '전문경영인' 입증


김선희 부회장의 고민은 오리온보다 심각했다. 김정완 회장의 사촌 동생인 김 부회장은 BNP파리바, 크레디아그리콜 은행, UBS, 한국 시티은행 경력을 가진 재무통으로, 사실상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는 주인공이었다. 더군다나 2009년부터 매일유업에 입사해 회사 이해도도 높았다. 김 부회장이 매일유업 지휘봉을 잡았을 당시 매일유업은 본업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자백색우유 시장은 출산율 감소, 대체 우유 시장 증가, 유대 인상 등의 원인으로 우유 소비가 감소하며 정체 현상을 보이는데 소비자들마저 수입멸균 우유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2년까지만 해도 꾸준한 출생아수 유지에 힘입어 안정적인 수요를 유지했던 분유사업도 경기 침체, 혼인율 감소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으로 출산율이 하락하면서 시장규모가 축소되고 있었다. 분유시장은 축소되는데 수입 분유를 유통, 판매하는 다양한 신규업체 유입이 활발해지면서 해외 브랜드와도 경쟁해야 했다. 위기에 직면한 김 부회장의 선택은 포트폴리오 확장. 김 부회장은 단백질 '셀렉스', 식물성 음료 '어메이징 오트' 등 제품구조를 확대하는 동시에 커피전문점 '풀바셋', 이탈리안 외식 매장 '더 키친 일뽀르노', 글로벌 차이니즈 브랜드 '크리스탈제이드' 등 외식사업도 키워나간다. 지난해에는 케어푸드 사업을 본격화했다.

우유시장 정체로 생존위에 내몰린 경쟁사와 달리 매일유업은 발빠른 사업다각화에 신사업들이 시장에 연착륙한 상태다. 특히 매일유업은 오리온, HY보다 먼저 신사업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중장년층을 겨냥한 단백질 브랜드 '셀렉스'다. 매일유업은 김선희 대표 취임 첫해인 2014년부터 평창 코호트 연구를 통해 성인영양식 제품 개발을 시작했다. 유제품에 국한된 포트폴리오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특히 기존 단백질 제품의 비릿한 맛 등을 개선해 ‘맛있는 단백질’을 목표로 삼았다.

간편함에 맛까지 호평 받으면서 셀렉스는 빠르게 성장했다. 식품업계에서 통상 ‘메가 브랜드’ 기준으로 삼는 매출 1000억원도 론칭 4년만에 달성했다. 2016년에는 정부와 손잡고 농촌형 테마공원인 상하농원을 조성했다. 김 대표는 상하농원을 햄·소시지·김치·잼 등을 생산 및 판매하는 브랜드로 가다듬었다. 현재 상하농원은 농축산업·제조·유통·서비스·관광 등을 아우르는 융복합 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작년 9월 유산균 발효유 ‘윌’을 중국에 수출한 데 이어 올해 대만, 북미 등으로 판로를 확대하며 해외 시장 개척에 물꼬를 텄다. 매일유업이 지난 2018년 선보인 ‘셀렉스’는 지난해 말 기준 누적매출 4400억원을 기록했다. 2022년엔 연간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하며 주력 사업으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