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차기 구축함 KDDX 조감도 (사진=HD현대)
대형 선박이 AI와 데이터로 움직이는 시대, 조선업의 경쟁력은 더 이상 건조 능력에만 있지 않다. 설계도와 제어 데이터, 협업 과정에서 오가는 수많은 기술 정보가 곧 국가 안보와 수조 원대 산업 성패를 가르는 변수로 떠올랐다. KDDX(한국형 차기 구축함) 논란은 ‘누가 더 잘 만드느냐’보다 ‘누가 맡을 자격이 있느냐’를 묻는 싸움으로 산업의 판을 바꾸고 있다.
대형 선박은 더 이상 강철과 용접의 결과물이 아니다. 위성항법장치(GPS), 자동식별시스템(AIS), 엔진 제어 장치, 그리고 AI 기반 조타 시스템이 결합된 복합 플랫폼이다. 선박 한 척에는 수만 개의 데이터 포인트와 실시간 통신망이 촘촘히 얽혀 있다.
지난 6월 중동 해역에서 두 대의 유조선이 충돌했다. 기상 악화도, 시야 장애도 없던 상황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업계에서는 사이버 교란 가능성을 제기했다. 선박은 위성항법장치(GPS), 자동식별시스템(AIS), 엔진 제어 장치, 그리고 AI 기반 조타 시스템이 결합된 복합 플랫폼이다. GPS 신호 왜곡이나 통신 장애가 발생했을 경우, 초대형 선박은 순식간에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
■ AI 선박 시대…기술 진화가 부른 새로운 취약성
국내 대형 조선사가 건조하는 LNG운반선과 군함은 대부분 AI 기반 항로 최적화, 자동 조타, 연료 효율 제어 시스템을 탑재한다. 연료 소비를 줄이고 안전성을 높이는 핵심 기술이지만 보안 사고가 발생할 경우 피해 규모를 기하급수적으로 키우는 구조이기도 하다.
문제는 선박 보안이 여전히 ‘IT 보안’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네트워크 침입 차단이나 서버 보안은 강화됐지만 실제 사고로 직결되는 조향·기관·운항을 담당하는 OT(운영기술) 영역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이 영역이 해킹될 경우 정보 유출을 넘어 충돌, 좌초, 엔진 정지 같은 물리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해사기구(IMO)와 국제선급협회(IACS)가 선박 사이버 보안을 의무화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AI 기반 침입 탐지 기술과 모의 해킹 체계를 개발하고 나선 이유 역시, 이미 운항 중인 6만여 척의 현존선이 보안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 “협업이 곧 위험”…조선업 구조가 만든 보안 딜레마
조선업의 본질은 협업이다. 선박 한 척에는 수백 개 기자재 업체와 시스템 통합사, 방산 기업, 정부 기관이 관여한다. 문제는 정보 공유가 필수적인 이 구조 자체가 보안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유하지 않으면 완성도가 떨어지고, 공유하는 순간 통제가 어려워진다.
2004년 한국가스공사와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이 공동 개발한 LNG 화물창 기술 ‘KC-1’은 이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 GTT의 독점 기술 의존을 깨겠다는 목표로 출발했지만, 실증 과정에서 ‘콜드스팟(결빙 현상)’이라는 구조적 결함이 드러났다. 이후 책임 소재를 둘러싼 소송이 이어졌고, 법원은 설계 주체인 가스공사의 책임을 인정했다. 가스공사는 수천억 원대 배상 판결을 받아들여야 했다. 기술 협업 자체는 의미 있었지만, 보안과 책임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는 남지 않았다. 조선·에너지플랜트 산업에서 협업 실패가 곧 법적·재무적 리스크로 직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 KDDX, 기술 경쟁 넘어 ‘보안 자격’ 묻다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은 대표적인 보안 불신 사례다. 총사업비 7조8000억원 규모의 대형 방산 프로젝트는 사업 방식 결정조차 2년 넘게 표류 중이다. 개념설계를 맡은 한화오션은 과거 HD현대중공업의 군사기밀 유출 사건을 이유로 경쟁입찰이나 공동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기본설계를 수행한 HD현대중공업은 설계 연속성과 관례를 들어 수의계약이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논쟁의 본질은 계약 방식이 아니라 ‘국가 핵심 전력을 맡길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했다.
논란은 결국 정치권으로 확산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공개 석상에서 “군사 기밀을 빼돌려 처벌받은 곳에 수의계약을 주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언급하며 보안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발언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란과 별개로 보안 이력이 더 이상 과거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결정 변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발언이다.
■ 설계도 한 장이 수조 원 흔든다
방산·조선 산업에서 설계도와 제어 데이터는 단순한 기술 문서가 아니다. 수출 통제, 외교 관계, 국가 안보로 직결되는 전략 자산이다. 한 번 유출되면 손해배상과 사업 중단, 국제 신뢰 추락이 동시에 발생한다. 조선업의 보안은 더 이상 한 기업의 내부 관리 문제가 아니다. 공동 사업 전체를 어떻게 설계하고 책임과 권한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산업 구조의 문제다. 조선업의 경쟁은 이제 바다 위 수주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데이터 전쟁터에서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