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금융 대전환」 3대 분야, 9대 과제(자료=금융위원회)
‘생산적 금융’이란 표현이 이재명 정부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먼저 사용됐지요. 당시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금융개혁’을 대체할 새로운 화두가 필요했습니다. 금융위원회 김용범 부위원장이 중심이 돼 ‘생산적 금융’과 ‘포용적 금융’이라는 개념이 채택됐었습니다. 물론 반짝 아이디어는 아니고, 2008년 금융위기 발생을 계기로 금융관료들 사이에서 반성·성찰적 사고가 누적된 결과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금융개혁’처럼 ‘생산적 금융’에 큰 힘이 실리지는 못했습니다. 적폐 청산과 소득주도 성장이 주요 국정과제였기에 금융정책은 핵심에서 벗어나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김용범 부위원장은 이재명 정부의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됐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비서실에서 파견 근무 중이던 권대영 부이사관은 현재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입니다. 금융위원회와 대통령비서실에서 ‘생산적 금융’ 합을 맞췄던 두 사람이 8년 뒤 근무지를 그대로 바꿔 다시 ‘생산적 금융’을 다루게 됐습니다. 두 사람의 지위가 장·차관급으로 격상된 만큼 ‘생산적 금융’에 실리는 힘도 8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는데요. 단적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5대 금융그룹이 향후 5년 동안 무려 500조원 이상의 자금을 ‘생산적 금융’에 투입하겠다고 약속한 것만 봐도 그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우리금융지주가 9월 29일 가장 먼저 80조원 계획을 밝히면서 분위기를 주도합니다. 이후 10월 16일 하나금융지주가 100조원으로 금액을 키워 동참했구요. 두 금융그룹보다 덩치가 큰 KB금융, 신한지주 역시 등 떠밀려 100조원 이상의 계획을 발표해야 하는 여건이 자연스레 조성됩니다.
하지만 연이어 들려올 것 같던 ‘생산적 금융’ 동참 소식은 하나금융 이후 잠잠했습니다. 사실 100억원도 아니고 100조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올해 6월말 기준 국내은행의 원화대출금 규모는 KB국민은행 372조원, 신한은행 322조원, 하나은행 309조원, 우리은행 299조원, NH농협은행 304조원입니다. 오랜 기간 당국·시장과 소통하며 기업자금과 가계자금을 5대5(KB·우리·농협), 6대4(신한·하나) 비율로 맞춰 놨는데 이걸 갑자기 7대3, 8대2로 바꾸는 것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비행기가 시속을 넘어 마하의 속도를 내려면 설계부터 싹 뜯어고쳐야 한다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말처럼 영업과 조직, 체질이 바뀌어야 하는 엄청난 작업입니다. 한두 달 만에 뚝딱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관료생활 40년 관록의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이 연도별 계획표까지 작성해 친절하게 ‘표준안’을 제시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뱃살 가득한 중년 남성이 혹독한 다이어트를 거쳐 5년 안에 ‘몸짱’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하며 계획표를 제출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 외국어학습업체 광고 카피처럼 ‘야,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다른 이들에게 손짓합니다. ‘관치금융’이 지배하는 한국의 경영환경에서 ‘난 괜찮아, 몸짱 아니어도 좋아’라고 쿨하게 튕겨낼 수 있는 금융그룹은 없습니다.
국내 1~2위의 KB금융과 신한금융이 계획표 작성에 너무 공을 들여 집계에 차질이 빚어지자 권대영 부위원장이 직접 나섭니다. 지난달 28일 ‘금융업권 생산적 금융 소통·점검회의’를 열어 다이어트 계획표 제출을 독려한 것인데요. 5대금융 외에 BNK·iM·JB·메리츠·한국투자 금융지주, 미래에셋·키움증권, 한화·교보생명, 삼성화재 등 증권·보험업계 담당자도 호출합니다.
권 부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 “정부와 금융업권의 공감대를 공유하고, 이를 위한 속도감 있는 실천과 실질·효과적인 추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고 회의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애로사항이 있으면 가감 없이 이야기해 달라”고 했지만 이날 회의의 방점이 ‘속도감 있는 실천’에 찍혀 있다는 것을 참석자들이 모를 리 없겠지요.
그로부터 1주일, NH농협금융이 108조원의 계획표를 내놨습니다. 5대 금융 중 이제 남은 곳은 리딩금융 타이틀을 다투는 KB금융과 신한금융. 두 금융그룹은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난 뒤 같은 날, 같은 금액(110조원)의 계획표를 제출합니다. 이로써 5대 금융 집계(508조원)가 완료됐습니다. 우리금융 발표 이래 총 6주 간의 여정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흐지부지됐던 ‘생산적 금융’이 이재명 정부 들어 다시 강력한 생명력을 갖게 된 데에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 정세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미중 갈등 격화에 따른 공급망 이슈가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에 발등의 불로 떨어졌고,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무자비한 관세정책이 기름을 끼얹습니다. 한국경제가 뿌리째 흔들리는 위기 상황에서 ‘공급망 재편 지원’ 정도가 해결책이 될 수 없겠지요.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어렵습니다. 이런 위기의식과 국민적 공감대가 ‘생산적 금융’이라는 단어에 긴박하고 간절하게 녹아 있는 것이겠죠.
3년 전 ‘챗GPT’가 등장하면서 인공지능(AI) 시대가 활짝 열렸는데 한국은 비전과 계획을 품기는커녕 얼토당토않은 비상계엄의 늪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여파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죠. 천신만고 끝에 늪에서 빠져나와 이제 겨우 다시 달릴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정부가 민간 금융회사들에게 ‘체질개선 계획표’를 제출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관치금융이라며 많이 시끄러웠을 테지요. 어찌 보면 위기가 갈등을 잠재운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개별 금융그룹들 입장에서 보면 우려스러움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몸짱만 있지는 않습니다. 뚱뚱한 사람도, 홀쭉한 사람도 있고, 키 큰 사람도, 키 작은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정상 체중, 표준 키를 달성하라고 국가가 강제로 지도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바람직함을 떠나 실현 가능성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더 심란해집니다.
그나마 기업자금과 가계자금 비중이 5대5인 KB금융, 우리금융, 농협금융은 사정이 나아 보입니다. 이미 기업자금 비중이 높은 신한금융과 하나금융은 체질 개선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특히 신한금융은 운신의 폭이 더 좁습니다. 그룹별 계획을 촘촘히 뜯어보면 하나금융의 경우 금액 면에서나 운영 면에서 몇몇 영리한 지점들이 눈에 띕니다. 반면, 신한금융은 계획대로라면 중소·중견기업에 72~75조원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정말 진심을 담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상황입니다.
혹자는 ‘연임이 확정된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의 차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색안경을 끼고 볼 사안은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신한금융 진옥동 회장은 ‘생산적 금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그룹의 체질 개선 기회로 삼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생산적 금융’의 성공을 위해 조직개편에 가장 적극적인 곳도 신한금융입니다. 만약 여러 악조건을 뚫고 체질개선에 성공한다면 5년 뒤 JP모건, 골드만삭스 같은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에 가장 근접한 금융그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장기간의 고금리 여파로 금융회사들의 부실자산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가 낯설지 않습니다. 과연 5년 뒤 한국을 대표하는 5대 금융그룹은 모두 ‘몸짱’으로 거듭나 있을까요. 모르긴 해도 이제부터가 진검승부일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