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북 아이비(사진=바이브 엔터테인먼트 제공)
[뷰어스=김희윤 기자] “‘레드북’은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웃음)”
아이비는 얼마 전 경연프로그램에서 모습을 비쳤다. 폭발적인 성량으로 압도적인 무대를 선사하는 가수로는 익숙하지만 아직까지 뮤지컬 배우란 수식어는 입에 착 감기지 않는다. 왜일까. 그는 2005년 가수로 데뷔하고 2010년에는 뮤지컬에 입문했다. 벌써 9년차 배우지만 오히려 대중적이어서 화려한 가수란 이미지가 잘 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무대를 본 사람들은 경탄을 쏟아내기 일쑤다. 어쩌면 무대 위의 아이비는 대중성까지 겸비해 더 완벽한 뮤지컬배우가 아닐까.
■ 즐거움을 찾기까지
“‘레드북’ 공연이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이제야 좀 여유가 생겼어요. 처음엔 굉장히 정신이 없었죠. 뮤지컬치고 대사도 많은 편이고 노래도 어려워서 신경을 많이 썼어요. 걱정을 많이 했지만 관객 분들은 상당히 즐거워하셨죠. 관객 분들의 호흡과 느낌을 통해 점차 안심하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은 재밌게 즐기면서 하려고 해요”
사실 그는 최근까지 무대공포증이 있었다. 더욱 완벽한 무대를 기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부담감이 즐거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깨닫는 바가 많았어요. 무대에서 틀리지 말자고 맘먹는데 그게 더 부담이 돼 겁을 먹었던 거죠. 내가 왜 갑자기 무대공포증이 생겼을까 돌이켜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신경 쓰였던 것 같아요. 나 자신이 평가의 노예가 돼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어요. 굳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고치고 싶었죠. 그때부터 열심히 마음 수양을 하면서 무대 위의 즐거움을 찾아나가고 있어요”
무대 위의 즐거움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라는 지점에서 골몰하던 그는 이제 무대 위에서 공연하며 관객과 함께 즐거움을 찾아 나선다.
“무엇이든 첫 인상이 중요하잖아요. 화려한 댄스가수로 활동해온 이미지가 잘 깨지진 않죠. 뮤지컬을 9년 동안 열심히 했지만 아직까지 무대를 보지 못한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뮤지컬은 일부러 공연장을 찾아오지 않는 이상 접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이번 작품을 통해 대중들이 뮤지컬 장르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하고 싶고, 이를 통해 공연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해요. 무엇보다 한국 창작뮤지컬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다는 걸 알리고 싶었죠”
그는 익히 공연계 부흥에 힘써왔다. 전작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벤허’ ‘아이다’ 등 굵직굵직한 라이선스 작품들을 주로 해오며 작품의 다양성 측면에서 이바지해온 바가 크다. 무엇보다 주어진 여건 안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배우다.
“사실 창작 뮤지컬이든 라이선스 작품이든 장르를 따지진 않는 편이에요. 그동안 시기적으로 라이선스 작품이 맞거나,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섭외가 많이 들어와 그 위주로 활동하는 빈도가 높았을 뿐이죠. 개인적으로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흥미에요. 나부터가 재밌고 흥미를 느껴야만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죠. 물론 작품이 좋으려면 내용도 중요해요”
좋은 연기로 작품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은 뮤지컬배우로서 당연하다. 무엇보다 그는 관객들이 ‘레드북’을 계속해서 보고 싶어 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레드북 아이비(사진=바이브 엔터테인먼트 제공)
■ ‘레드북’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
“‘레드북’은 많이 궁금한 작품이었어요. 이미 주변인들로부터 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개인적으로도 밝은 내용의 작품을 하고 싶었어요. 전작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어두우면서 에너지를 많이 고갈하는 작품이라 힘에 부치는 편이었죠. 실제로도 밝은 감성을 갖고 있는 편이라 마츠코를 연기할 땐 자주 아팠어요. 열이 펄펄 끓는대도 연기한 적도 있었죠. 많이 지쳐있는 상태에서 밝은 메시지를 가진 작품이 들어와, 유리아 씨의 공연실황 영상을 봤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창작공연에선 들어보지 못한 세련된 이미지와 노래들이 마음에 와 닿아서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됐죠”
아이비는 ‘레드북’에 뉴 캐스트로 합류했다. 그가 연기한 안나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레드북’이라는 잡지를 출간한 후 일어나는 사회적 통념에 맞서 나가는 당찬 인물이다.
“안나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런 지점들이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점이죠. 용기 있고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멋진 여자인 만큼 역할을 통해 배우기도 하죠. 특히 작품에서 안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잘못된 건 아니라구요’라는 대사를 하는데, 나야말로 누군가를 겉모습을 보고 차별해온 사람은 아닐까 하고 반성하게 됐어요”
작품은 사회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많다. 무엇보다 보수적인 시대에 안나를 전면에 내세워 ‘성 차별’이라는 하나의 주제에만 함몰되지 않도록 개성적이고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트랜스젠더처럼 보이는 로렐라이를 보면 겉모습으로 남을 평가하는 잣대를 문제의식으로 들 수 있잖아요.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친 차별에 대한 이야기보단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죠. 결국에는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해요. 여러 면에서 힐링이 되는 작품이었죠”
그의 말처럼 ‘레드북’은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다양한 주제의식들이 책처럼 펼쳐진다. 그런 점에서 다원화된 우리사회의 고충들과 교집합인 부분이 많다.
“최근에 세상의 어두운 면들이 밖으로 나와 좀 더 반갑기도 해요. 작품을 하면서 타인이 겪는 부당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죠. 평범하게 살아가는 주변 친구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여러 가지 부당한 대우를 겪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잖아요. 학창시절을 보내고 남들처럼 일반적인 회사생활을 했다면 그런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연예인으로선 크게 부당한 경험을 당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도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에게 좀 더 도움이 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나 봐요”
레드북 아이비(사진=바이브 엔터테인먼트 제공)
■ 아이비만의 초심 되찾기
아이비는 작년 ‘벤허’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거쳐 ‘레드북’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겹치기 출연도 아닌데 쉬는 날이 하루도 없을 만큼 낮에는 연습하고 밤에는 공연하는 바쁜 생활을 병행해왔다.
“그동안 전형적인 예쁜 캐릭터부터 공주, 깍쟁이 등 재밌는 캐릭터를 많이 해왔어요. 더 해보고 싶은 게 없을 정도로 다 해봤죠. 아마 나이를 먹으면서 역할도 자연스레 달라질 수 있겠다고는 생각해요. 무대는 계속 서겠지만 꾸준히 하기도 쉽지 않고, 여배우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한정돼 있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는 어떨까 무턱대고 예측할 순 없지만 작은 역할이라도 꾸준히 할 수 있다면 행운이지 않을까 해요”
그는 무대공연을 꾸준히 하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 있다. 다만 잠깐이라도 공백을 가지면 금방 잊히는 부분들이 일을 못 쉬도록 만든다는 아쉬움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려 한다.
“일 욕심이 많았는데 이젠 좀 내려놓고 좋아하는 일을 해나가고 싶어요. 내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내실을 다져나가는 시기죠. 이것저것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현실에 충실하면서 살고 싶어요. 지금 내가 왜 이 일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생각하며 본질적인 부분을 항상 염두에 두려고 하죠. 일단 올해 말까진 뮤지컬을 계속 할 것 같고, 기회가 된다면 음원도 내고 싶어요”
알고 보면 그는 끈기 있게 중심을 잡고 나아가는 뮤지컬배우다. 그간에 부담감을 떨쳐내고 즐거움을 되찾기까지 고민하고 노력했을 흔적들이 눈에 선하다.
“연기는 어렵기보단 재밌는 분야라고 느껴져요. 당연히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나죠. 뮤지컬배우로서 연기든 노래든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요. 궁극적으로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심보다도 믿음직한 배우이거나 믿고 보는 배우가 되고 싶죠. 기꺼이 티켓 값을 지불해도 아깝지 않은 배우가 되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