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책표지)
[뷰어스=문다영 기자]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이토 시오리가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과 그 이후 일본 사회의 반응을 가감 없이 기록한 논픽션이 세상에 나왔다.
'블랙박스'로 일본에 이어 한국 독자를 찾은 이토 시오리는 2017년 5월, 일본의 '사법 기자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성폭력 문제에 폐쇄적인 일본에서 피해자가 얼굴을 보이고 실명으로 기자 회견을 연 것은 처음이었다. 이토 시오리가 펜을 들게 만든 성폭행 사건은 2015년 4월 3일에 일어났다. 당시 로이터 재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저자는 뉴욕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던 시절 알았던 TBS 워싱턴 지국장 야마구치 노리유키를 도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야마구치는 저자에게 TBS 워싱턴 지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했다. 저자는 비자와 처우 문제를 상의하고자 그를 만났고 꼬치구이 가게에 이어 두 번째로 들른 초밥 가게에서 술을 더 마신 이후 기억을 잃는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 위에는 야마구치가 있었다. 지금까지 존경하고 신뢰하던 언론계 대선배이자 정치부 유명 인사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성폭력은 그 누구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공포와 고통을 낳고 그것은 오랫동안 그 사람을 괴롭게 한다'고 말한다. 강간 피해 직후 저자는 자신을 나무랐다. 그러나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고 유감스럽게도 한번 일어난 일은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야마구치 지국장을 신고하기로 결정하지만 용기를 내어 경찰서에 찾아간 날부터 결심을 흔들리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두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얘기를 털어놓았던 여성 경찰관은 교통과 소속이었고, 드디어 만난담당 남성 수사관에겐 "자주 있는 일이라서 사건으로 수사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어렵사리 출발선에 선 피해자에게 너무나도 잔혹한 말이었다는 회고. 여기에 더해 증거가 없어 영장을 청구할 수 없고 상대방을 임의 소환해 의견을 듣는 정도로 끝날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다행히 담당 수사관의 열정적 수사에 힘입어 가해자를 체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하지만 체포 목전에서 체포 중지가 선언되고 사건을 맡았던 수사관과 검사도 모두 바뀌고 만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증거 은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 결국 저자는 기자회견을 통해 직접 피해 사실과 그 과정을 모두에게 알린다.
이후의 일도 요즘 '미투'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2차 피해로 인해 더 이상 일본 언론사에서 일하기도 어려워 영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여전히 언론인으로 활동 중인 야마구치와는 민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저자는 피해자 A가 아니라 이토 시오리로서 책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 나선다. 사건이 있고 불기소 결과가 나오기까지 1년 4개월간 저자는 제대로 일할 수가 없었다. 성폭행 후유증으로 무릎을 많이 다쳐 몸은 온전하지 못하고 정신은 말할 것도 없이 피폐해진 상태. 하지만 가해자인 야마구치는 TBS를 그만두고 바로 아베 총리에 대해 쓴 '총리'라는 책으로 일약 정치부 스타 기자로 승승장구한다.
그렇게 '블랙박스'는 어느 개인의 경험을 넘어 사회의 구조적 문제도 함께 전달한다. 데이트 강간 약물 사건 등의 강간 피해와 스웨덴의 강간 긴급 센터에 대해 취재한 내용도 함께 담겨 있어 미투 폭풍이 휩쓴 최근 국내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이토 시오리 | 미메시스 | 252쪽 | 1만 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