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어스=이소희 기자] 드라마는 유의미한 장면들로 이뤄진다. 한 장면 속에 인물의 삶을 보여주는 상황,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대사들이 담긴다. 작품, 그리고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들여다볼만 한 장면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사진=JTBC 화면 캡처)
■ 장면 정보
작품 제목: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
방송 일자: 2019년 2월 19일(4회)
상황 설명: 한순간에 70대로 늙어버린 김혜자(김혜자, 한지민). 마음은 그대로지만 몸은 함께 노화되어 온몸이 안 아픈 구석이 없다.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혜자는 밥만큼이나 많은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 장면 포착
이정은: 밥 차려줄 테니 밥 먹어.
김혜자: 이따 먹을게. 입맛이 없어.
이정은: 약 먹어야 하잖아. 입맛 없어도 먹어. (약을 챙겨주며) 이거 밥 먹고 먹어. 이따 손님 있으면 점심 챙겨줄 새 없으니까 알아서 챙겨먹고.
(혜자, 엄마 이정은이 나간 뒤 한숨을 푹 쉰다)
김혜자: (내레이션)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 나이만큼 약을 먹는 거나 다름없다. 어르신들이 밥상 앞에서 밥맛없다고 하던 게 이해가 간다. 식사보다 그 이후에 먹어야 하는 수많은 약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배가 부르니까. 예전에 TV에서 봤던가. 양식장 속 연어들이 밥과 같은 양의 항생제를 매일같이 먹으며 작은 수조에서 살고 있었다. 그쯤 되면 연어들은 스스로 사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약발로 사는 거였다. 앞을 가로막는 세찬 물살도, 매서운 곰의 발톱도 경험해보지 못한 연어는... (꼴깍 침을 삼키며) 연어초밥 먹고 싶다.
김혜자: (크게 소리친다) 엄마! 저녁에 연어초밥 먹으면 안 돼?
(사진=JTBC 화면 캡처)
■ 이 장면, 왜?
김혜자는 평생 할머니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로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의 도시락을 싸고 엄마의 미용실 일을 도우며 가족들 앞에서 활짝 웃는다. 친구들에게도 사실을 터놓았다. 하지만 마음이 생각한 대로 될 리가 없다. 혜자는 아무리 현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문득문득 회의감이 들고 슬픔이 밀려온다.
혜자가 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장면은 그의 이런 복합적인 마음을 잘 드러낸다. 건강검진은 혜자가 본인의 나이를 알고자 자처한 것이다. 그러나 혜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는 거기까지였다. 수북이 쌓인 자신의 약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고, ‘정말 내가 늙었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기만 했다.
혜자는 자신의 인생을 잃었다. 비단 청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나이를 먹으며 겪어야 할 좋은 경험도, 슬픈 경험도, 화나는 경험도 모두 겪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 응당 몸과 마음에 축적되어야 할 연륜도 없다. 그 어떠한 삶의 자극도 없이 집 안에서 나오지 못한 채 요리를 하고 집 근처 동네 우동집만 오가는 혜자는 양식장 속 삶을 ‘연명’하는 연어와 다를 바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몸만 커버린 혜자라는 건 마음은 여전히 ‘25살 김혜자’라는 뜻이다. 혜자는 여전히 엉뚱하고 푼수 같다. 반려견 밥풀이가 자신의 냄새를 맡게 하겠다고 술을 마시거나 자신의 옷 냄새를 맡다가 “씻어야지”라고 말하는 장면, 이준하(남주혁)와 함께 밥풀이를 부르면 누구한테 먼저 올지 내기하기로 해놓고 ‘하나 둘 셋’을 외치기 전 “밥풀아!”라고 부르며 반칙을 쓰는 장면 등을 보면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진지하게 자신의 처지를 연어에 빗대 말하는 순간에도 ‘연어초밥이 먹고 싶다’고 말하는 의식의 흐름은 ‘눈이 부시게’가 마냥 진지하게 흘러가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혜자의 캐릭터가 순수하고 단순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애초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셈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웃긴 신들은 배우 김혜자와 한지민이 같은 인물이면서도 비주얼적으로 간극이 있는 캐릭터를 실감나게 그린 덕분에 가능했다. 한지민은 1회에만 출연한 뒤 늙어버려서 쭉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단 1회만으로도 극 중 혜자의 성격과 언행을 임팩트 있게 보여줬다. 그로 인해 김혜자가 한지민을 따라하는 행동과 말투는 계속해서 1회 때의 한지민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곧 김혜자의 연기 역시 억양과 행동 하나하나 디테일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극 설정에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