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중동 방문을 마치고 9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추격이나 뒤따라오는 기업과의 ‘격차 벌리기’만으론 거대한 전환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미국 출장 때 이같이 말했다. 삼성의 상징과 같은 ‘초격차 전략’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한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고객 경험, 고객 만족으로 레벨을 높이겠다는 것. 이는 그가 구상하는 '뉴삼성'으로 읽혔다.

최근 단행된 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에서 이 부회장의 '뉴삼성' 핵심 키워드 '고객 경험'이 면모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진화된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 경쟁업체와의 초(超)격차를 벌린다는 전략에서 더 나아가 제품 개발단계부터 판매 이후까지 고객 만족에도 총력을 기울인다는 이 부회장의 구상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14일 삼성그룹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12일 기존 소비자가전(CE)과 모바일(IM)을 통합한 세트(완제품) 부문의 명칭을 ‘디지털 경험(DX, Digital Experience) 부문’으로 변경했다. ‘DX’의 ‘X(eXperience)’는 차별화된 제품과 서비스를 통한 ‘고객 경험 중심’이라는 브랜드의 방향성을 제시한 개념이다. 새로 출범하는 DX 부문은 디스플레이(VD), 생활가전, 의료기기, 모바일(MX), 네트워크 등의 사업부로 구성됐다.

아울러 삼성전자는 1995년부터 써온 무선사업부 명칭을 ‘모바일 경험(MX, Mobile Experience) 사업부’로 바꾸기도 했다. TV, 가전, 스마트폰, 통신장비 등 다양한 제품과 고객 요구를 반영한 서비스로 고객 경험을 최우선 제공하겠다는 경영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신설 조직도 나왔다. 삼성전자는 이번 조직개편에서 ‘CX·MDE 센터’를 신설했다. CX는 고객 경험(Customer eXperience)을, MDE는 멀티 디바이스 경험(Multi Device Experience)을 뜻한다. MX 사업부 안에 있는 GDC(Global Direct to Consumer) 센터는 온라인 중심의 온라인 비즈 센터로 재편했다.

부서명은 단순한 호칭을 떠나 사업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사업부 명칭에서 고객 경험을 가장 중요시하겠다는 삼성전자의 미래 구상을 가늠할 수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 “TV·가전·스마트폰·통신장비 등 다양한 제품과 고객 니즈를 반영해 소비자에게 최적화한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가 '경험(Experience)'을 강조한 것은 제품을 단순히 소유하기보다는 제품으로 달라질 세상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는 의미다. 단순히 기기 하나를 내놓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고객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는 데 힘쓰겠다는 것. 이를 위해 개인이 필요로 하는 맞춤형 기술과 지능화가 '뉴삼성'의 핵심 사업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고객 경험 또는 사용자 경험(UX)은 소비자가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총체적 경험을 의미한다. 많은 기업이 오래전부터 기기의 품질만큼 소비자가 어떻게 하면 기기와 서비스를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재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이 시점에서 고객 경험을 새로운 지향점으로 제시한 것이 이 부회장이 강조해온 미래사업과 관련 있다고 해석한다. 이 부회장은 지난 8월 향후 3년간 시스템 반도체와 바이오·6세대(6G) 이동통신·인공지능(AI)·로봇 등에 24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AI와 전장 등은 사용자 경험이 중요한 대표적인 사업”이라며 “최근 사용자 경험이 부각되면서 이 부회장의 관심이 조직개편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근 빌표된 임원 인사에서도 고객 경험을 우선시하겠다는 이 부회장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번 임원 인사에서 신사업 담당 임원들을 대거 승진하며 '뉴삼성'을 이끌 인재로 앞장서게 됐다. UX 전문가인 홍유진 부사장, 클라우드와 AI 전문가인 고봉준 부사장, 음성처리 개발 전문가인 김찬우 부사장, 사물인터넷(IoT) 비즈니스 전문가인 박찬우 부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삼성전자 내 고객경험(CX) 전문가로 꼽히는 안용일 신임 부사장이 승진한 것이 삼성전자 안팎의 관심을 끌었다. 삼성전자는 CX·MDE 사무국장을 맡아 왔던 안 디자인경영센터 UX센터장을 부사장으로 승진시키고 CX·MDE센터를 새롭게 설립하며 힘을 실어줬다.

디자인 조직을 마케팅 등 특정 부서에 하부 조직으로 두기보다는 경영층에 가깝게 두거나 리더의 직급을 높이는 등 방식으로 독립성을 확보해야 디자인 지향 조직을 설립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중장기 CX 로드맵을 수립하고 전사 차원의 UX 일관성을 강화하는 등 고객 경험 혁신을 주도했다”고 안 부사장의 승진 이유를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시간이 갈수록 모바일과 가전의 경계가 점차 불분명해져 고객의 경험을 묶어줄 수단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며 “이런 경계가 사라진 고객 경험을 묶어주는 수단으로 디자인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DX부문장을 맡게 된 한종희 부회장은 MDE 미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 부회장은 내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정보기술(IT)·가전 박람회인 CES 2022에서 MDE 등과 관련한 삼성의 혁신 전략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 부회장은 내년 1월 4일 오후 6시30분(미국 서부시간 기준) 기조연설을 통해 지속 가능한 지구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 위한 삼성전자의 노력과 더욱 풍요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데 도움을 줄 혁신 기술들을 소개한다.

한편 삼성전자는 로봇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기존 CE 사장 직속으로 운영하던 로봇사업화 태스크포스(TF)를 정식 부서인 로봇사업팀으로 격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