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대상 수상작 ‘하우 투 체인지 더 월드’ (사진=환경재단)
10여 년 전, 다큐멘터리 ‘하우 투 체인지 더 월드’의 제리 로스웰 감독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린피스가 세계적 환경단체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작은 고무보트를 타고 포경선 사이를 오가며 시위를 중계하는 장면과 조직이 성장하며 겪는 내부 갈등과 분열이 동시에 드러나는 다큐였다.
영화 속 인물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이는 패트릭 무어였다. 젊은 시절 15년간 그린피스에서 활동하고 회장직까지 맡았던 그는 이상보다 재무와 조직 확장을 우선시하며 내부 갈등을 남긴 채 단체를 떠났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한국이 탈원전으로 뜨거웠던 2020년이었다. 이번에는 ‘탈원전에 반대하는 그린피스 창립자’라는 이름표와 함께였다. 영화 속에서 보던 얼굴이 다시 나타났지만, 반갑지는 않았다. 혹자는 그를 ‘친원전 로비스트’로 평가한다.
새로운 사회적 기류가 등장할 때 누군가는 대중 대신 목소리를 높이며 주목받는다. 패트릭 무어는 신념이 명분으로 포장될 때 조직과 사회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경고였다. 한때 핵 실험과 포경 반대 등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신념이 자기 목적과 맞닿으면 위험으로 바뀐다. 신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해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이번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보면서 문득 그가 떠올랐다. 화려한 기후테크와 에너지 고속도로라는 구호 뒤에는 여전히 부실한 실행 기반과 불투명한 책임 구조가 놓여 있다. 예산은 7조원에 불과하고, 기후에너지부 신설은 빠졌다. 협의체는 시작부터 삐걱거렸고 정책 추진 속도와 책임 소재는 모호하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사회적 흐름에 편승해 자기 목적을 숨길 수도 있다.
누가 진짜 신념을 가졌는지, 누가 편승하는지 구분할 수 있을까. 그 많은 자료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를 알아볼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선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정의로운 전환을 열렬히 주장하던 누군가가 시간이 지나 업계 로비스트로 다시 소개되는 상황이다.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고 화려한 구호는 달짝지근하지만 그럴듯한 함정일 수 있다. 구호가 아니라 행동과 책임, 그리고 신념을 선택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 과정을 주도하던 이를 업계 로비스트로 다시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