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중공업이 건조한 LNG운반선 (사진=HD현대)
국내 조선업계가 20년 만의 슈퍼사이클 속에서 수주 랠리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은 AI 기술력을 앞세워 고부가 선종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고 조선 빅3는 AI·디지털 기반의 ‘스마트조선소’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AI 전환이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원가 폭탄’을 조용히 키우고 있다는 경고가 커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확대와 글로벌 전력망 증설로 구리·알루미늄·전선 등 핵심 원자재 가격이 동반 급등하면서 조선업의 원가 민감도는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다.
■ 안 그래도 높은 원자재 민감도···AI 전환으로 ↑
조선업은 원자재 가격 변동에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선박 한 척에는 후판(철강), 전선(구리), 구조재(알루미늄)이 대량 투입되지만 원가 상승을 선가에 즉각 반영하기 어렵다.
여기에 최근 조선업의 AI·전기화 전환 흐름이 민감도를 더욱 키우고 있다. 글로벌 원자재 컨설팅기관 우드맥킨지는 2035년까지 구리 수요가 24%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증가분 대부분이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증설에서 발생한다. AI 서버 전력 사용량은 일반 서버 대비 최대 8배에 달한다.
HD현대중공업은 AI 생산관리 플랫폼 ‘AIMaster’로 용접·취부 공정을 자동화하고 있으며, 삼성중공업은 AI 설계–자율운항–로보틱스 중심의 스마트조선소로 전환 중이다. 한화오션도 그룹 AI 조직과 연계한 데이터 기반 생산체계를 구축 중이다.
AI 기술력은 LNG·암모니아 추진선 수주전에서 분명한 우위를 제공한다. 그러나 동시에 구리 대란이라는 새로운 병목을 만들고 있다. 전력 케이블·변압기·냉각설비 등 대부분이 구리 기반이기 때문이다.
■ 철광석·석탄·구리 ‘삼중 급등’의 압박
AI 산업이 ‘구리 블랙홀’로 변하면서 가격은 1년 새 57% 치솟았고 변동성도 기존 예측 범위를 넘어섰다. 이는 구리 사용 비중이 높은 조선업에 즉각적인 부담으로 작용한다.
LNG·암모니아·수소·전기추진선 등 친환경·전기화 선박은 전력 수요가 큰 만큼 구리 투입량도 크게 늘어난다. 구리는 ▲전력·제어 시스템용 전선 ▲동박·전력변환장치 ▲센서·제어장치용 Cu-Ni 합금 ▲배관·밸브용 내식성 합금 등에서 필수 소재다. LNG 운반선 전기계통과 FLNG 등 해양환경 대응 설비 역시 구리 의존도가 높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내년 3월 구리 가격을 톤당 1만1500달러로 제시했고 6·9·12월 전망치도 1만2000~1만3000달러까지 상향했다. UBS는 “전기차·재생에너지·전력 인프라·데이터센터 확대가 2025~2026년 구리 수요를 연평균 2.8% 증가시킬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선업의 또 다른 핵심 원자재인 철광석·석탄 시장도 불안정해지고 있다. 철광석 선물 가격은 지난 24일 CNY 800에 근접하며 3주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고 석탄 가격도 톤당 111달러로 8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중국 경기부양과 전력 수요 증가에 대한 기대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 ‘광물’ 지배해야 슈퍼사이클 ‘완성’
한국 조선업은 AI·전기화 전환을 앞세워 글로벌 고부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AI 시대가 만든 초고전력 인프라 경쟁과 구리·알루미늄·전선 가격 급등은 새로운 원가 폭탄, 즉 보이지 않는 함정으로 부상했다.
한국 조선업이 이번 슈퍼사이클을 단순한 ‘수주 호황’으로 끝내지 않고 실적과 수익성까지 완성된 슈퍼사이클로 만들기 위해서는 AI 기술과 함께 광물 공급망을 통제하는 전략적 역량이 결정적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