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어스=김재범 기자] 그의 눈이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싫었다. 본인도 그렇게 말을 했다. 데뷔 23년차 이정재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출발한 배우였다. 중년이 된 그는 ‘멋지게 나이를 먹은 남자’가 됐다. ‘신세계’를 함께 한 최민식이 그의 나이를 듣자마자 박훈정 감독에게 이정재를 강력 추천했다는 일화는 이미 충무로의 전설이다. 그는 멋지게 나이를 먹어간다는 의미를 온 몸으로 발산하는 그런 배우다. 멋진 배역은 있지만 멋져 보이는 배역은 이정재를 통해 처음 알게 됐었다. ‘신세계’ ‘관상’ ‘암살’ 등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며 선과 악을 널뛰기하는 그의 모습은 관객들의 눈과 귀를 뒤흔들어 놓는 ‘멋짐’이었다. 그런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선택했을 때는 다소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정재의 선택이라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란 선입견을 가져봤다. 결과는 극명한 취향의 문제를 드러냈다. 물론 좋고 나쁨의 기준은 관객의 몫이다. 이정재의 눈과 가슴은 어땠을까.
여유가 있고 또 유쾌했다. 유쾌한 것 자체가 여유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그것이라도 이 배우에겐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자신의 손을 떠난 100억이 넘는 거함의 종착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것도 아니기에 그저 웃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웃음으로 첫 인사를 대신했다. 물론 그 안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작품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변하지 않았다.
“영화 본 소감이요? 재미있게 잘 봤어요. 제가 이렇게 말한 적은 처음이예요. 하하하. 정말이에요. 전 기대한 만큼의 결과물이 나와 만족스러워요, 전쟁 영화인줄 알았는데 첩보영화였더라구요. 그랬잖아요(웃음). 한국전쟁 배경 첩보 얘기는 없었잖아요. 기획이 신선했어요. 짜임새도 있다고 판단했죠. 또 한 가지는 인천상륙작전이 단순하게 맥아더 장군의 공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잖아요. 그게 아니란 걸 알리고 싶었죠.”
그는 이번 ‘인천상륙작전’에서 해군특수부대 소속 장학수 대위를 연기한다.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리암 니슨)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전을 이끈 실질적인 인물이다. 놀랍게도 극중 장학수 대위는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이정재는 이 점이 더욱 끌렸단다. 알려지지 않은 영웅에 대한 얘기를 전하는 사명감 같은 느낌이었다.
■ ‘실화’ 그래서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
“뭐랄까요. 일종의 사명감? 맞아요.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아요. 절체절명의 마지막 임무란 느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잖아요. ‘저 정도로 결의가 있었구나’란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죠. 시나리오 속 인물들이 전달하는 그 느낌 속에 사실 좀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우려도 있었죠. 이 얘기가 ‘팩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너무 영화적인 포장이 드러나면 욕을 먹게 될 것 같았어요.”
하지만 공개된 영화는 예상 밖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일종의 ‘반공영화’로 불리며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흥미와 재미는 놓치지 않았지만 언론과 평론가들의 혹평은 집중됐다. 주연을 맡은 이정재로서는 당황스러운 현상이었단다. 예상을 못한 부분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반응이 놀라웠다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란 점이 이 영화를 해보고 싶었던 여러 이유 중에 하나였던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이 영화를 정치적 해석의 중심으로 끌고 갈 것이란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어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실화의 힘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면 분명 관객들의 마음도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너무 혹평이 쏟아지고 있어요. 특히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 영화를 해석하더라구요. 당황스러웠죠. ‘이게 뭘까’란 느낌? 그냥 영화인데(웃음)”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개봉 뒤 흥행이란 결과로 보상 받는다면 너무 속 보이는 바람일까. 그는 진심이 누군가에겐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경력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혹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란 가능성조차 생각나지 않게 배역에 집중하고 또 집중해 촬영에 ‘올인’했다고.
“실화잖아요.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대사 한 마디를 던지더라도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요. ‘어떻게 하면 더 설득력을 갖출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대사를 내뱉었죠. 단순히 쎄게 말한다고 해서 그런 힘을 갖는 것은 아니잖아요. 장학수의 톤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했어요. 상황 속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부대원들 신뢰와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인물로 만들어야 했죠. 그게 생각보단 쉽지 않더라구요(웃음)”
사실 배역에 대한 쎈 이미지가 이정재에게는 남아 있었다. 최근 출연한 작품들이 모두가 그랬다. ‘도둑들’부터 ‘신세계’ ‘관상’ ‘암살’까지 이정재를 빼놓고는 상상이 안되는 작품들이었다. ‘인천상륙작전’도 전쟁 영화의 외피를 쓴 일종의 첩보영화다. 더욱이 이정재가 맡은 인물은 역사에 남아 있는 실존 인물이었다. 이 지점은 분명 배우에게 고민이 될 부분이었다.
“진중하게 접근한다는 자세 외에는 사실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또한 ‘관상’부터 ‘암살’ 그리고 이번 영화까지 시대극을 연달하니깐 이미지가 고정될 것이란 우려도 주변에서 했던 게 사실이구요. 그런데 사실 그 중간에 한중합작영화 ‘역전의 날’도 찍었어요. 나름 다양하게 하고 있어요(웃음). 그런데 요즘은 센 영화만 들어와요. 좀 말랑말랑한 현대물을 고르는 게 쉽지 않아요. 10개 중 9개가 연쇄살인법을 쫓는 형사 또는 연쇄살인범처럼 강렬한 캐릭터가 많아요. 제 의도는 분명 아니에요(웃음)”
■ 데뷔작 ‘젊은남자’ 기억 남는 작품
이정재는 한때 국내 코미디 영화 주연을 도맡아 하던 시절을 경험했다. ‘박대박’ ‘오! 브라더스’ ‘1724 기방난동사건’ 그리고 ‘선물’에선 배역 자체가 ‘코미디언’이었다. 그가 이들 영화에 출연하던 시기는 충무로의 주류가 코미디였다. 지금의 스릴러 대세론과는 전혀 딴판의 트렌드가 힘을 얻던 시기다.
“다 그때 중훈이 형님이 너무 열심히 하셔서 그랬어요(웃음). 뭐 저도 혈기 왕성해서 뭐든 하겠다고 덤비던 시절이었고. 하하하. ‘정사’에서 쎈 노출도 했었고. 그때 제 나이 배우로선 진짜 파격이었죠. 여러 방면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어요. ‘젊은 남자’도 기억에 남죠. 제 또래 배우 중에 배창호 감독님과 작업한 경험을 가진 배우가 있을까요?(웃음)”
할리우드 대스타인 리암 니슨과 작업은 그에겐 이번 ‘인천상륙작전’을 기억 속에 남게 할 경험이었다. 리암 니슨은 내한 행사에서 이정재의 연기력을 극찬하며 추켜세웠다. 이정재 역시 리암 니슨의 성실함과 살신성인의 자세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충무로가 아닌 할리우드에서 리암 니슨과 조우할 날도 머지않았을지 모른다.
“정말 그 작은 돈을 받고 그런 분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대단했죠. 그냥 존경스러운 분이에요. 나라면 절대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하하하. 할리우드에서 그분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요. (할리우드 진출을 위해 대표작 3편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음...우선 리암 니슨과 함께 한 ‘인천상륙작전’은 무조건 보내야 할 것 같은데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