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히어라
[뷰어스=김희윤 기자] “공연이 끝나면 시원하게 돌아서서 칼퇴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웃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헤모스’ ‘찌질의 역사’ ‘카라마조프’ ‘팬레터’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로 쉼 없이 달려왔다. 뮤지컬배우 김히어라처럼 열일하는 배우가 또 있을까. 그는 뮤지컬 본 공연은 물론 리딩공연과 쇼케이스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림까지 그리며 3월에는 개인 전시회까지 연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 않을까. 자그마한 물음표를 던져본다.
■ 1등으로 걷기 시작한 꿈의 길
“고등학교 때 예체능 반이 있었어요. 발레나 노래, 연기 이런 걸 배웠죠. 막연하지만 그땐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중에서도 영화 쪽으로 진출해보고 싶었죠. 당시 강원도에서 살았는데 연기 정보를 접할 마땅한 입시학원이 없었어요. 어떻게 하나 고민하던 중 함께 연기하는 친구가 인덕대학에서 주최하는 공연예술 대회 소식을 전해줘 각자 참가하게 됐죠. 사물놀이 팀도 나오고, 뮤지컬 갈라쇼 팀도 있을 정도로 분야가 다양했던 대회로 기억해요”
그는 대회에 참가했지만 사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고 구석에서 조용히 있는 성격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뮤지컬 배우가 된 걸까.
“인터넷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대사를 찾아보고 노트에 써가며 무작정 연습했어요. 조정은 선배님이 연기한 부분인데 로미오가 죽고 난 뒤 줄리엣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죠. 지금 다시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연기를 하면서도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1등을 했죠. 배우분이 심사를 해줬는데 너무 잘 봤다고 좋았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뮤지컬을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됐죠”
그의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도 모두 잘할 거라고 격려해줬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상까지 받고 나니 그는 더욱 자신감이 넘쳤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혼자 오디션을 보고 실력으로 들어가는 거니까 괜찮을 것 같아서 도전하게 됐어요. 대회에서 상금으로 받은 300만 원은 서울에 올라와서 연기 레슨 받는 비용으로 쓰고 결국 뮤지컬 전공을 택하게 됐죠”
그는 뮤지컬을 꿈의 길로 삼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도전한 일이었기에 기라성 같은 동기들에 비하면 스스로가 작아 보여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배우 김히어라
■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2009년 ‘살인마 잭’으로 데뷔했어요. 열심히 작품을 거듭하다보니 점점 중요한 게 보이기 시작했죠. 우선 작품이 재미있고 내가 잘 표현해낼 수 있는가를 본질로 삼았어요. 욕심내서 하고 싶더라도 내가 부족하게 여겨지는 작품들은 주저하기 마련이었죠”
그런 그가 이제는 새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있다. 바로 작품 내외적으로 다가오는 관계다. 작품의 재미와 표현만큼이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물들이 주는 관계가 아닐까 해요. 좋은 동료, 좋은 창작진들이 모여야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죠. 특히 초연 때부터 해온 ‘팬레터’ 땐 운이 좋았어요. 실력을 겸비한 좋은 배우들이 많아 작품이 꾸준히 잘 됐죠. 또 얼마 전엔 ‘레드북’이란 작품을 봤거든요. 이 작품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게 정말 좋은 사람들과 좋은 배우들이 함께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봐요”
그는 배역을 통해 주어지는 주변적인 관계를 특히 신경 쓴다. 배역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점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만, 상대배우와 함께하는 장면에서 힘을 줘야하는 부분과 빼야하는 부분을 크게 나눠 더욱 디테일하게 좁혀간다. 한 번에 여러 작품을 할 때도 그렇다.
“초연작품과 재연작품을 같이 하면 혼란스럽진 않지만 공연마다 배역을 넘나들면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은 있어요. 그래서 너무 바쁘면 안 될 것 같죠. 물론 좋은 점도 많아요. 우선 무대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좋죠.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캐치할 수 있거든요. 잠시나마 다른 사람으로 살다 오면 작품을 다시 보게 되고 좋은 영향을 받아 더 발전하게 돼요. 물론 한 작품만 지속적으로 연기한 사람이 더 깊다고는 생각하죠. 그만큼 여러 배우들과 소통도 깊게 하고 꾸준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연기도 좋아져요”
배우 김히어라
■ 이유 있는 연기, 끊임없는 소통
김히어라는 본 공연에 앞서 진행하는 쇼케이스만 두 작품이다. 뮤지컬하우스 블랙 앤 블루의 ‘아티스트’와 창작산실 ‘카프카:호프’다.
“3~4월을 기점으로 뮤지컬하우스 블랙 앤 블루와 창작산실 쇼케이스를 앞두고 있어요. ‘아티스트’와 ‘카프카:호프’라는 작품이죠. 창작산실 ‘카프카:호프’의 경우는 이미 리딩 공연을 진행했었고, 연출님도 같이 하자고 해주셨어요. 뮤지컬하우스 블랙 앤 블루 ‘아티스트’란 작품도 먼저 연락이 왔죠. 나중에 그림을 그리게 되는 역할인데, 실제로도 그림을 그리다보니 배역과 잘 어울린다고 해주셨어요. 역할을 통해 보여줄 부분이 많을 것 같아 참여하게 됐죠. 요즘은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내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를 떠올리니까 더 하고 싶었어요”
그는 쇼케이스를 준비하는 가운데 두 작품과 관객들의 평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아직 연습이 시작된 건 아니에요. ‘카프카:호프’는 워낙 많이 했기에 이걸 다시 줄이는 과정에 들어갔죠. ‘아티스트’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요. 예술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죠. 재능과 노력 사이에서 솔직하게 고민하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아마 실제 공연까지 이뤄지면 많은 분들이 좋아하실 거라 생각해요. 예술가들의 거친 면을 좀 더 호감 가고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고 싶죠. 이걸 보고 작품에 많이 이끌리셨으면 좋겠어요”
최근 시끌벅적한 사건들과는 별개로 공연계는 이제 많은 부분들이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뮤지컬하우스 블랙 앤 블루나 창작산실의 경우도 작품 개발이나 신진 작가의 데뷔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동안 다양한 창작진들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거나 그럴 여건이 많이 없었어요.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죠. 물론 아직까지는 제작비가 모자라거나 약소하면 좋은 공연장을 잡기 어려운 현실이에요. 소통이 중요하니까 보증된 배우나 창작진들이 아니면 쓰임받기도 어렵고, 그래서 많은 창작진들이 뮤지컬하우스 블랙 앤 블루나 창작산실 등에 나가고 싶어 하죠. 이런 점에서 모든 배우나 창작진들에게 더욱 다양한 기회가 열렸으면 해요. 작품 속 남녀구성 면에서도 한 성별에 편향되지 않고 폭이 넓어졌으면 좋겠어요”
공연계가 변해가고는 있지만 아직까진 아쉬운 지점이 많다. 그럼에도 공연관계자들 모두가 공연을 잘 올리자는 똑같은 목적을 가진 만큼 다함께 잘해낸다면 좋은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항상 캐릭터에 미친 듯이 즐겁게 몰입하면서도 노래부터 대사, 조명 등 약속을 생각하면 실수해선 안 된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뮤지컬을 하면 배우의 모든 몸짓과 시선을 관객 분들이 함께 느끼니까 도망갈 구멍도 없고 발가벗은 기분이 되죠. 그럼에도 어디선가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연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더 최선을 다해야죠”
그는 올해 초까지 너무 바빴다. 공연을 한 번에 두 개씩 하고 연습과 리딩, 쇼케이스도 하며 개인전 준비로 인해 작품을 거절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이지만 뭘 해도 진중하게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다.
“계속해서 고민하고 연기하면 창작진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내가 원하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공연해낼 수 있다고 믿어요. 앞으로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소통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최선을 다해 즐겁게 공연하고 난 뒤에는 시원하게 돌아서서 칼퇴근하는 배우, 그런 열려있는 사람을 꿈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