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어스=손예지 기자] 이이경을 TV에서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한다. 신예들의 스타 등용문이라고 통하는 KBS2 ‘학교 2013’에서다. 이이경은 극중 일진 3인방 중 한 명인 ‘이이경’ 역을 맡았다. 신인 배우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바랐던 제작진의 배려로, 그는 캐릭터 이름 대신 본명으로 불렸다. 교복을 모델처럼 소화하는 훤칠한 키, 무쌍꺼풀의 날카로운 눈매에 ‘무서운 일진’을 상상했는데, 이이경의 연기는 예상을 벗어났다. 말투는 꾸밈없이 털털했고 허술한 모습이 웃음을 자아낼 때도 있었다. 주인공도 아니었고 비중이 큰 배역도 아니었지만, 이이경에게는 분명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이후 여러 TV드라마·웹드라마와 영화를 거치며 작은 역할에도 자신만의 매력을 담아내 ‘차세대 신 스틸러’로 떠올랐다. 그중에서 감초로서의 이이경이 가장 빛난 작품은 지난해 방영된 KBS2 ‘고백부부’다. 주인공 반도(손호준)의 절친 독재 역을 맡아 몸을 사리지 않는 코믹 연기를 보여줬다. 이이경은 당시의 제 역할이 ‘환기’였다고 표현했다.

“대본을 볼 때 내 역할보다 숲 전체를 보려고 노력해요. 이와 관련해 작품마다 PD님이나 감독님과 상의도 많이 하고요. ‘나’를 보여주려고 작품을 망치면 안 되니까요. ‘고백부부’ 때 독재의 포지션은 ‘환기’였어요. 장르는 예능 드라마인데 장면마다 감동과 눈물이 있는 작품이었거든요. 극이 너무 진지하게만 흐르지 않도록 독재가 분위기를 전환해야 했죠”

작품마다 자신의 쓰임새를 고민하던 이이경은 ‘고백부부’의 손호준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손호준 형님은 독재가 주가 되는 장면이 있으면 ‘너의 것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고 했다. 다른 배우들에게도 ‘독재에게 몰아주자’면서 응원하고 용기를 줬다. 그런 선배를 만나기 쉽지 않은데 형님에게 많이 배웠다”는 것.

그 덕분일까. ‘고백부부’에 이어 출연한 JTBC ‘으라차차 와이키키’에서는 감초 이상, 주연으로서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줬다. 이이경은 극 중 생계형 단역배우 준기를 연기했다. 준기는 어떠한 시련과 고난에도 꺾이지 않고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인물이다. 이이경은 “우연이었지만 비슷한 점이 많은 캐릭터였다”고 설명했다. 극 중 준기는 유명배우인 아버지(이덕화)의 후광을 받으며 스타가 되고 싶지 않아 제 정체를 숨긴다. 이이경도 아버지가 대기업 CEO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금수저 연예인’으로 주목받았었다. 그러나 이이경 역시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기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준기가 홈쇼핑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바지를 찢어먹거나 미소 교정기를 착용해 침을 흘리는 장면들에서 제 과거가 떠올랐어요. 저도 아동극에서 인형 탈을 쓰거나 마트 시음 코너 안내원 일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는 그게 힘들지 않고 재밌었어요. 준기도 당시의 저처럼 긍정적으로 달려가는 게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대사를 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어요. 감동은 시청자가 받아야지 제가 받고 연기하면 안 되는데. 유난이었죠. 하하”

이이경의 경험이 만들어낸 준기는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여기에 김정현·손승원·정인선·고원희·이주우 등 청춘 배우들과의 호흡이 어우러져 ‘으라차차 와이키키’의 인기를 견인했다. 이에 방송이 4회나 연장되고 스페셜 코멘터리 방송이 편성되는 등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이경은 “국장님이 ‘으라차차 와이키키’에 대한 애정이 크다며 코멘터리 방송도 직접 촬영해주셨다”며 고마워했다.

“연장 방영도, 코미디 장르도, 제 대사가 이렇게 많은 것도 ‘으라차차 와이키키’가 처음이었어요. 반응이 이렇게 좋았던 작품도 처음이라 느끼는 게 많았죠. 댓글들이 재미있더라고요. ‘준기 덕분에 우울증을 치료했다’ ‘월요병을 극복했다’ 등. 덕분에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고된 촬영 일정에도 기운을 낼 수 있었던 데는 촬영장의 분위기가 큰 몫을 했다. 이이경은 “비슷한 나이의 배우들이 모여 애드리브가 자유로웠다”고 했다. 이창민 PD가 대사를 끝내도 ‘컷’을 외치지 않아 배우들이 즉흥연기로 남는 시간을 채워야 했다고.

“다들 각자의 캐릭터가 되어서 연기를 주고받았어요. 덕분에 극에 잘 녹아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애드리브에 제일 강했던 배우를 꼽자면… 저요. 하하. 일 많이 했거든요. 극 중 준기의 차 이름이 ‘레베카’가 된 것도 저의 아이디어였어요. 원래 대본에는 ‘준기 차’라고만 나왔는데 이게 좀 더 잘 보이면 좋겠더라고요. MBC ‘무한도전’에서 레베카란 이름의 마네킹이 나온 적이 있어요. 마침 자동차가 카(car)이기도 하고, 잘 맞는 것 같아 이름으로 붙였죠. 나중에는 대본 자체에 ‘준기 차’가 아니라 ‘레베카’라고 나오더라고요. 하나의 인격체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이경은 특히 극 중 연인을 연기한 고원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원희는 정말 대단하다”면서 “굉장히 열정적이고 두려움이 없다. 원희가 다칠까 봐 걱정한 적이 많았을 정도”라고 했다.

“원희는 ‘리허설의 여왕’이라고 불려요. 리허설부터 100%를 보여주는 친구여서요.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원희는 해요. ‘으라차차 와이키키’ 촬영 전에 원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신종훈 감독님이 원희와 독립영화를 작업한 적이 있다면서 ‘깡 좋고, 열심히 하는 배우’라고 칭찬하셨거든요. 그 말대로였어요. 정말 열심히 하는 배우예요. 수염이 자라는 설정이었잖아요. 원희는 수염이 모자라 보이면 더 그려달라고 했어요. 더 예뻐 보이고 싶었을 수도 있는데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원희 덕분에 준기·서진 커플이 더 돋보인 것 같고요”

‘으라차차 와이키키’에는 이이경의 실제 연인인 정인선도 함께 출연했다. 최종회 방송을 앞두고 열애 사실이 보도돼 반응이 뜨거웠다. 이이경은 “속이려던 게 아니라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며 사과했다. 그런 한편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하고 응원한다는 시청자 반응이 많아 다행이었다고 덧붙였다.

“20회 동안 둘이 붙는 장면이 딱 두 개뿐이었어요. 중반부터 촬영팀이 A·B팀으로 나뉘면서 만날 기회가 더 없어졌고요. 작품에 피해를 주지 말자고 이야기했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었죠. (정인선의 매력은) 배려심이 깊고 대화가 잘 통한다는 점이에요. 직업이 같아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요. 요즘도 바쁠수록 더 열심히 하라고 해줘서 고맙습니다”

배우에게 ‘인생 캐릭터’가 생긴다는 것은 득이자 독이다. 이미지가 굳어질 수도 있고, 기대가 큰 만큼 시청자들을 실망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이경은 이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보다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는 방식을 택했다. ‘으라차차 와이키키’가 끝나자마자 촬영을 시작한 MBC ‘검법남녀’다. 이이경은 극 중 열혈 형사이자 바람둥이 차수호를 연기한다.

“‘으라차차 와이키키’ 촬영이 끝날 때쯤 PD님과 작가님이 ‘네가 다음 작품을 할 때, 시청자는 웃을 준비를 하고 볼 수 있으니 조절을 잘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요즘 ‘검법남녀’ 촬영에서 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에게 물어봐요. ‘혹시 나한테 준기 보였어?’라고”

이이경은 배우로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대에 다양한 경험을 해서 30대에 경험을 바탕으로 실전에서 움직이고, 40대에는 자리를 잡고 50대에 베풀고 싶다”는 것이 그 그림이다. 그중 ‘자리 잡기’란 “임창정 선배가 코믹 연기의 대가로 불리는 것”과 같다. “다만 그 자리는 시청자와 관객들의 반응으로 잡히는 것”이라면서 이후 교육자로서 재능을 기부하거나, 현장에서 후배들에게 몸소 알려주는 등 다양한 방식의 베풂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올해 나이 31세. ‘실전 투입 단계’에 돌입한 이이경은 바쁜 일정에도 오히려 기운차다. “배우는 쉬고 싶지 않아도 쉴 때가 오기 때문에, 지금은 나를 찾아주는 현장이라면 어디든 가서 몸을 던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으라차차 와이키키’를 촬영하며 허리사이즈가 31인치에서 28인치로 줄었다는 이이경이다. 티는 내지 않지만 지쳤을 법하다. 그런 그에게 힘이 되는 한 마디를 물었다.

“잘한다! 요즘 ‘검법남녀’ 촬영장에서 항상 긴장한 상태예요. ‘검법남녀’ 스태프들도 준기 때문에 저에 대한 기대치가 높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카메라 감독님이 한마디 하셨어요. ‘너, 잘한다’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 정말 좋았습니다”

뷰어스 손예지 기자 yeyegee@nate.com 손예지 기자의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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