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
[뷰어스=노윤정 기자] “한 여성의 성장기”
채시라는 MBC ‘이별이 떠났다’를 이렇게 정의했다. 아내나 엄마이기 전에 한 여성의 이야기라고. 그렇기에 ‘이별이 떠났다’ 속 채시라가 연기한 서영희는 시청자들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채시라는 서영희의 서사에 묵직한 울림을 더하며 35년차 배우의 관록을 증명했다.
채시라는 ‘이별이 떠났다’를 통해 ‘착하지 않은 여자들’ 종영 이후 3년 만에 다시 시청자들과 만났다. 채시라가 ‘이별이 떠났다’를 차기작으로 선택한 이유는 한 여성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영희는 자신의 이름대신 남편 한상진(이성재)의 아내, 아들 한민수(이준영)의 엄마로 불리는 인물이다. 하지만 한상진의 외도로 서영희의 전부였던 가정을 깨졌고 서영희는 한민수의 연인인 정효(조보아)를 만나기 전까지 3년 간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고 살게 된다. 그러다 정효와의 관계 안에서 상처를 치유해간다. 극은 채시라의 바람처럼 서영희가 아내나 엄마가 아닌 오롯이 서영희로서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됐다.
(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
서영희라는 캐릭터가 처한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다. 남편의 외도로 결혼 생활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됐지만 서영희는 경제권을 자신의 쥔 채 이혼을 거부한다. 그건 서영희만의 생존 방법이었다. 그 상태로 서영희는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간다. 그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버거울 수도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채시라는 ‘여성’이기에 서영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 역시 아내이고 엄마이고 또 그 이전에 여성이기 때문에 평상시 느꼈던 부분들을 좀 더 극대화해서 서영희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도 작품을 안 할 땐 아내이고 엄마이고 주부에요. 서영희처럼 극단적인 모습은 아니더라도 가족들이 각자 일을 나가고 난 뒤엔 집에서 혼자 멍하게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울적하게 있을 수도 있죠. 사시사철 기분이 좋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일상의 경험들을 끄집어내서 극대화시킨 거죠. 여성이기 때문에 서영희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던 자양분이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이별이 떠났다’는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드라마화하면서 원작자인 소재원 작가가 직접 대본을 집필했다. 그래서일까. 작품 속 대사는 일상적인 대화체가 아닌 소설체에 가깝게 느껴진다.
“작가님이 일부러 문어체를 많이 썼다고 이야기하셨는데 나도 정말 신선했어요. 일상적인 대화체가 아니라 그런 문어체를 소화하는 게 재미도 있었어요. (…) 자연스럽게 입에 익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도 자연스럽게 돼요. 어설프게 하는 건 스스로도 용납이 안 되고요. 대사를 완벽히 살려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했어요”
(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
채시라는 이번 작품에서 감정신을 촬영할 때면 늘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코끝이 찡한 기분 때문에 힘들 때가 많았고 그걸 견디기 위해 애를 많이 썼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서영희의 마음이 이해됐기에 먹먹했고 감각적인 문어체 대사들은 감정을 더 강하게 건드렸다. 그렇게 몰입하다보면 캐릭터에 감정이 동화돼 촬영이 끝나고도 작품과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많다. 채시라 역시 캐릭터에 온전히 녹아든 연기를 보여준 만큼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진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채시라는 웃으며 일상과 극 중 상황을 분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고 밝혔다.
“비교적 개인으로서의 나와 극 중 역할을 잘 분리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식구들이 영희처럼 말한다고 할 때는 있었어요. 나는 그냥 말한 건데 식구들은 영희처럼 말한다고 한 적이 있어서 역할에 빠져있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웬만해서는 집에 딱 신발 벗고 들어가는 순간 원래 채시라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물론 영희의 잔재가 남아있긴 하겠지만 일상생활을 할 때도 캐릭터에서 못 빠져나오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어떤 캐릭터에서 못 벗어나서 괴로웠던 적은 별로 없어요. 물론 만약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다고 하면 감정의 여운이 더 오래 갈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며 아이며 일상에서 신경 쓸 게 너무 많고 내 역할도 너무 많아요. 캐릭터의 감정이 남아 있을 틈이 없어요”
(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
채시라는 배우다. 동시에 딸이자 아내이고 며느리이자 엄마다. 그야말로 일인다역이다.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일상 속에서는 캐릭터의 감정에 젖어 있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겠단 생각이 든다. 그래도 가족들의 응원이 있기에 작품 활동을 하는 데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시부모님과 통화를 자주하는 편인데 시부모님께서도 내가 작품에 들어가면 최대한 신경을 안 쓰게끔 해주세요. 나도 작품에 철저하게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런 식구들의 배려와 응원이 있으니까 훨씬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많은 역할 중에 채시라는 엄마 역할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채시라는 슬하에 고등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다. 엄마로서의 모습을 말하자면 자녀들에게 열정을 많이 쏟는 편이라고. 채시라는 정답이 없고 시행착오도 줄여야하기에 더 어려운 것이 엄마가 되는 일인 것 같다고 말한다.
“엄마 역할이 제일 힘들어요. 어떻게 하는 게 엄마로서 잘하는 건지, 어떤 게 정말 아이를 위하는 건지, 나는 위한다고 했는데 이게 정말 아이에게 도움이 됐는지 늘 고민이에요. 훌륭한 엄마가 되고 싶고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은데 그게 정말 어려워요”
‘이별이 떠났다’를 통해 엄마로서 느낀 점이 있는지를 물으니 “적어도 아들이라면 민수처럼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고 딸도 정효 같은 상황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교육을 잘 시켜야겠구나 싶었죠. 딸 가진 부모, 아들 가진 부모로서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교육을 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또한 며느리가 생긴다면 어떤 시어머니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엔 “사실 우리 어머님과는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아니라 자식과 엄마처럼 지내거든요. 편하게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요. 그렇게 친구처럼 소통도 많이 하면서 지내는 시어머니가 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
채시라는 1984년 한 초콜릿 광고로 데뷔했다. 신드롬적인 인기를 누린 인기 광고였기에 당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채시라는 경력 35년차 배우가 됐다. ‘이별이 떠났다’ 현장에서도 서영희 아버지로 특별출연한 최불암과 양희경(김옥자)을 제외하곤 가장 선배였다. 청춘스타가 중년의 베테랑 배우가 됐다. 그 긴 시강 동안 채시라가 지켜온 연기 철칙이 있다.
“항상 정도(正道)로 가고 싶어요. 고리타분한 걸 말하는 게 아니라 기본이 되는 길이요. 내가 함께 하는 배우가 어리든 연세가 있으시든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거죠. 또 나는 내 신이 끝났다고 해서 대충하거나 현장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그 신이 끝나기 전까진 현장을 떠나지 않으려고 해요. 현장에서 상대방과 함께 호흡을 맞춰주는 게 배우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서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저와 함께 한 후배들이 그런 부분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어요”
'정도'는 채시라가 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신념이기도 하다. 배우는 연기로서 대중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화면에서 예쁜 모습만을 보여주려 하다 보면 그 기본을 놓치게 된다. 채시라는 그 점을 경계했다. 배우는 예쁘게만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힘주어 말하는 채시라는 그 어느 배우보다도 참 아름다워 보였다.
“‘여명의 눈동자’ 때도 후반부에 OSS 요원이 된 뒤 드레스를 입고 립을 바르고 나오는 몇 장면 빼곤 화장도 하지 않고 넝마를 입고 검댕을 묻히고 있었어요. 그때 처연한 아름다움이 얼마나 예쁜지를 느꼈어요. 물론 당시 나이가 어리기도 했지만 어림이 주는 예쁨은 물론이고 나 자신을 내려놓은 느낌에서 오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정말 예쁘게 보였어요. 배우가 배우로서 빛나는 때는 그런 순간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망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쁘게 보이려고만 하는 게 배우는 아니거든요. 서영희 역할을 하면서 점점 예뻐진다는 말을 들었을 땐 물론 기분 좋았어요. 하지만 나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고 화장을 하지 않고 있던 초반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