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뷰어스=문다영 기자] 하루 종일 약국에서 아픈 이들을 위해 약을 짓는다. 아침 저녁으론 유치원에 다니는 큰 아이를 돌봐야 하고 뱃속에는 둘째가 자라고 있다. 워킹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도 벅차지만 그 시간의 틈새를 파고들며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릿속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그렇게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자는 시간도 모자라서 앉은 책상. 하얗게 빛나는 화면에서 머리와 가슴으로 써내려간 새로운 세계들이 차곡차곡,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 만들어낸 이야기가 2018년 가장 사랑받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tvN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동명 원작을 쓴 정경윤 작가의 이야기다. 둘째를 임신하고, 약국을 운영하던 중에 써내려간 한 편의 소설이었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몰래 현직비서들의 커뮤니티에 가입해 비서인 척 소설에 필요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게 완성한 책은 현직비서인 독자로부터 “현실적이었다”는 호평을 받았고, 세상에 나온 지 5년 만에 2018년 가장 핫한 드라마 중 한편으로 기록됐다.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나도 글이나 쓸걸” 하고 부러워하는 주변인들이 있는가 하면 마음가는 대로 쓴 글로 화려한 인생이 펼쳐졌다는 시선도 있다. 작가를 꿈꾸는 누군가는 정경윤 작가를 미치도록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정경윤 작가는 어떤 선입견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다. ‘작가를 그만둘까’ 깊이 고민했던 시절, 구간이었던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선물처럼 안겨준 대박 이후 그는 ‘왜 글을 계속 써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 외에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며 아이들이 깨어나기 전인 새벽 시간 글을 쓴다. 즐거워서, 행복해서 글을 쓴다는 정경윤 작가를 11월 30일 ‘2018 카카오 크리에이터스 데이’ 강연 후 만났다. 미래의 경쟁자들 앞에서 깊은 속까지 드러내며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는 그의 모습은 악역 없는 ‘김비서가 왜 그럴까’와 꼭 닮아 있었다. 강연 후 만난 정 작가는 강연에서의 떨림이 잦아들지 않은 채였다. 100만 독자를 유입하거나 1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작품에 붙는 ‘밀리언 페이지’의 주인공인데 소녀처럼 수줍어하는 모습이 낯설다. 가장 인기가 뜨거웠던 당시 카카오페이지가 독점으로 소설 웹툰을 꼭 쥐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가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란다. “은퇴를 해야 하나 싶었던 시기에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사랑받으면서 다시 힘을 냈어요. 처음 생긴 웹소설 플랫폼에서 정식 연재를 한 적이 있는데 결과가 미적지근했거든요. 그 후로 글을 쓰는 게 재밌지 않았어요. 종이책에서 모바일 환경으로 옮겨 오면서 마음으로 방황하게 됐고 설 자리가 없어졌다 싶은 것도 있었죠. 2년 정도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슬럼프였어요. 어떻게 좋은 글을 쓸까 생각하면서도 은퇴해야 하나 싶었죠. 출판사 분이 달래서 근근히 글을 쓰던 중에 출판사 측에서 카카오페이지의 ‘기다리면 무료’에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들어간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나온지 한참 된 구간을 넣어서 이번에도 실패하면 정말 낙동강에 가서 수온 재봐야 하는 것 아니냐 싶어서 말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내 생각과 완전히 달랐고 말 그대로 조회수가 날아다니더라고요. 그 이후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고요. 왜, 어느 유통업계 회장이 어렵게 일군 지점만 보면 눈물 난다고 하잖아요. 나도 그래요. 길 가다 노란색만 봐도 ‘심쿵’하고 카센터의 ‘카’만 봐도 절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은퇴를 생각하던 시기 일어난 반전. 게다가 인기에 힘입어 드라마까지 만들어지면서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정 작가 표현에 따르면 ‘이번 생에 이룰 거 다 이뤘구나’ 싶었던 순간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의 캐릭터들이 실사로 움직일 것이란 말을 듣고 너무도 설렜다. 정 작가는 드라마를 보고서야 자신이 왜 계속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했다. 가족들과 함께 모여 앉은 TV, 그 안에서 자신이 만들었던 가상인물들이 숨을 쉬고 말을 하고 걸어다니는데 ‘이거구나’ 싶었다고. 그는 “살다 보면 뭔가를 계산하고 따지고 하겠지만 정말 글 쓰는 데 있어선 그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재고 따지다 보니 중요한 걸 놓쳤던 거죠. ‘쓰는 내가 재밌어야 한다’는 것, 그걸 깨달았어요”라고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단순한 성공, 그 이상의 가치를 전해줬다고 밝혔다.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 '남주를 만드는' 여주인공의 가치 그러나 이 작품이 이룬 성공은 아직도 얼떨떨하다는 것이 정 작가의 솔직한 생각이다. 올해로 꼭 데뷔 10년차가 된 그는 로맨스 소설 작가에서 이제 웹소설 작가로 불린다. 종이책에서 모바일 환경으로 넘어오며 실패와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잘 안착했다. 오히려 새로운 환경에서 성과를 내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임에도 여전히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왜 인기를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작가인 본인도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 마음을 올해 초 새로 펴낸 애장판 표지 속 물음표와 같다고 설명하는 그. 그러나 이 작품에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를 넘어선 공식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재벌인 남자주인공과 신분상승을 하는 캔디형 여주인공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재벌인 남자 주인공이 멋져지는 건 여자 주인공 덕이다. 로맨스에 남녀간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싫었던 정 작가의 풀이법은 남녀 평등을 어느 때보다 갈구하는 이 시대의 욕망과 맞아떨어졌다.  ‘수동적 여주인공에서 탈피하고 싶었다’는 그의 바람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자 정경윤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정 작가는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며 약사를 그만뒀는데 글을 쓰겠다는 생각보다는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그러면서도 글 쓰는 일은 그만두지 못했는데 당시 한 생각이 ‘이거라도 안하면 정말 주부만 된다’였다고 한다. 아내 정경윤, 엄마 정경윤에서 벗어나 글 쓰는 동안 오롯이 ‘정경윤’으로서 살아있다는 걸 느꼈다고.  그러나 자신을 살아있게 한 글쓰기는 약사 출신이란 이력 때문에 도리어 안정적 직업을 둔 이의 취미활동 정도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정 작가는 “주변에서도 ‘나도 글이나 좀 써볼걸’ 이런 말씀들 많이 하세요. 10년 동안 얼마나 괴로웠는데요. 좋아하는 일도 하려 하고 일상도 지켜야 하고 애들 피해도 안 주려 노력하다 보니 정말 개인 시간이 너무 없었어요. 누구나 주어진 환경이 다르죠. 내게 돌파구는 글이었어요. 인생이 윤택해지는 돌파구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요. 다만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똑부러진 답변을 내놨다.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최선을 다했기에 가족도 세상 누구보다 작가 정경윤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있다. 처음 약사를 그만둘 때 아쉬워했던 남편은 정 작가보다 드라마 첫방을 더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고. 특히 남편이 한 말은 잊을 수가 없단다. 그는 “남편도 약사인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난 죽으면 아무것도 안 남지만 넌 죽으면 이름이라도 남겠구나’라고 했어요”라며 자신의 꿈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남편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다만 아이들의 반응은 곤란할 때도 있다. “큰 애가 초등학교 5학년인데 자랑도 하고 하는 모양이에요. 친구가 작가가 꿈이라 하니 ‘너 작가 하려면 우리 엄마처럼 손가락 안 보일 정도로 키보드 칠 수 있어야 해. 그럴 수 있어?’라고 하더라고요. 자꾸 자기 이름을 주인공으로 써달라는데 어휴, 못써요. 감정 이입해서 글을 쓰는 스타일인데 베드신이라도 나오면 어휴…(웃음)” 가족들이 꿈을 인정해줬다면 대중은 소설, 웹툰, 드라마로 오기까지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 한결같은 호응으로 성공을 안겨줬다. 사실 이 작품에는 흔히 말하는 막장코드나 고구마(답답한)전개가 없고 그 흔한 악역조차 없다. 요즘 트렌드와 정반대 길을 걷고 있음에도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러죠? (웃음) 편하게 읽으실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자극적 요소들이 많지 않아서요. 사실 로맨스 소설 공식으로 보면 이성연으로도 삼각관계가 갔어야 하는데 나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에요. 내가 원했던 이상적 연애의 모습을 그려가는 것이랄까요. 특히 모든 창작자가 책임감을 가지고 있겠지만 스스로 도덕적 기준이 더 타이트합니다. 그래서 악역이 있는 게 힘들어요. 대부분 해피엔딩이기도 하고요. 내 표현에 너무 제한을 두려 하지는 않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더 공부하게 되고 더 조심스럽게 쓰게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소설이 웹툰화됐고, 웹툰까지 인기를 얻으며 드라마화됐다.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지나가는 비, 낮에 나온 달’과 ‘크리스마스의 남자’ 두 작품도 드라마 제작 가능성을 엿볼만 하다. 정 작가 역시 이 두 작품을 드라마화 됐으면 좋겠는 작품으로 꼽기도 했다. 이에 더해 그는 만약 자신의 작품이 또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영준을 완벽하게 소화한 박서준이 주인공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박서준을 처음 봤을 때 ‘사람이 아니구나’라 생각했다는 정 작가는 “사실 (박서준을) 만나보기 전까진 우리 아들이 박서준 씨처럼 자라줬으면 했는데 실제로 보고 나서는 ‘넌 안되겠구나’ 냉정히 생각했습니다”라는 말로 박서준이 명백한 페르소나임을 밝혔다. 박민영에 대해서도 인격적으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는 그는 박서준과 박민영이 열애설에 휩싸였을 때 순수한 팬심으로 ‘정말 잘 어울린다. 결혼까지 갔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을 정도란다.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 올해 신작발표 미뤄져…초심으로 다시 시작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 가족 이야기를 할 땐 영락없는 이웃 아줌마지만 글쓰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진중하다. 정 작가는 글쓰는 이들 누구나 바라는 성공을 이뤘지만 스스로는 앞으로 계속해서 글을 써나가는 게 진정한 성공이라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이같은 소신은 제 2의 정경윤을 꿈꾸며 글을 쓰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정 작가는 창작을 꿈꾸는 이들에게 “시장이 너무 커지면서 과열되기 시작하고 이 때문에 글을 쓰는 이들도 덩달아 조급한 것 같아요”라며 “사실은 이게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즐기지 않는 한은 끝까지 가기 어려운 직업인데 너무 조급한 것 같아요. 여유를 좀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단, 즐기면서 쓰되 하루 얼만큼이라도 글을 쓰는 지속성이라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글쓰는 일이 생활 패턴으로 자리잡는 게 연재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보물입니다”라고 진심어린 조언을 전했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안겨준 희열에 취한 것 같다고 냉정한 진단을 내린 그는 스스로를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 새 작품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올해 말 신작을 발표하겠다던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몇 번 엎었어요. 시놉시스 설정을 두어 번 바꾸기도 했는데 스스로 마음에 안들어서요. 재미도 재미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김비서가 왜 그럴까’ 영향이 아주 없진 않아요. ‘김비서가 왜 그럴까’도 내가 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준을 거기에 맞추면 이후 작품활동을 못하겠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을 아주 버리고 다른 글을 쓰는 건 아직 안돼서 올해까지는 일단 머리를 비우자, 선을 그어둔 상태입니다. 알아보는 분도 많아지고 성공, 성공하니 일단 랜선부터 끊었는데 내 일상부터 지켜야 앞으로의 정경윤 작가가 이어져 나갈 것 같더라고요” 작가답게 세심한 감정으로 대중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정 작가는 독자들의 사랑을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보물’이라 표현한다. 그 마음에 보답하는 것은 좋은 작품이라 답하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어렵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며 10년 동안 매일 글을 써왔다. 그렇기에 연말의 약속은 미뤄졌지만 아쉬워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잇는 작품이 아닌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잊게 만드는 작품을 들고 올 것이 자명하기에.

[마주보기] '김비서가 왜 그럴까' 정경윤 작가가 바꿔놓은 '여주인공'의 가치

문다영 기자 승인 2018.12.05 10:52 | 최종 수정 2137.11.08 00:00 의견 0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뷰어스=문다영 기자] 하루 종일 약국에서 아픈 이들을 위해 약을 짓는다. 아침 저녁으론 유치원에 다니는 큰 아이를 돌봐야 하고 뱃속에는 둘째가 자라고 있다. 워킹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도 벅차지만 그 시간의 틈새를 파고들며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릿속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그렇게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자는 시간도 모자라서 앉은 책상. 하얗게 빛나는 화면에서 머리와 가슴으로 써내려간 새로운 세계들이 차곡차곡,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 만들어낸 이야기가 2018년 가장 사랑받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tvN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동명 원작을 쓴 정경윤 작가의 이야기다. 둘째를 임신하고, 약국을 운영하던 중에 써내려간 한 편의 소설이었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몰래 현직비서들의 커뮤니티에 가입해 비서인 척 소설에 필요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게 완성한 책은 현직비서인 독자로부터 “현실적이었다”는 호평을 받았고, 세상에 나온 지 5년 만에 2018년 가장 핫한 드라마 중 한편으로 기록됐다.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나도 글이나 쓸걸” 하고 부러워하는 주변인들이 있는가 하면 마음가는 대로 쓴 글로 화려한 인생이 펼쳐졌다는 시선도 있다. 작가를 꿈꾸는 누군가는 정경윤 작가를 미치도록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정경윤 작가는 어떤 선입견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다. ‘작가를 그만둘까’ 깊이 고민했던 시절, 구간이었던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선물처럼 안겨준 대박 이후 그는 ‘왜 글을 계속 써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 외에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며 아이들이 깨어나기 전인 새벽 시간 글을 쓴다. 즐거워서, 행복해서 글을 쓴다는 정경윤 작가를 11월 30일 ‘2018 카카오 크리에이터스 데이’ 강연 후 만났다. 미래의 경쟁자들 앞에서 깊은 속까지 드러내며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는 그의 모습은 악역 없는 ‘김비서가 왜 그럴까’와 꼭 닮아 있었다. 강연 후 만난 정 작가는 강연에서의 떨림이 잦아들지 않은 채였다. 100만 독자를 유입하거나 1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작품에 붙는 ‘밀리언 페이지’의 주인공인데 소녀처럼 수줍어하는 모습이 낯설다. 가장 인기가 뜨거웠던 당시 카카오페이지가 독점으로 소설 웹툰을 꼭 쥐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가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란다.

“은퇴를 해야 하나 싶었던 시기에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사랑받으면서 다시 힘을 냈어요. 처음 생긴 웹소설 플랫폼에서 정식 연재를 한 적이 있는데 결과가 미적지근했거든요. 그 후로 글을 쓰는 게 재밌지 않았어요. 종이책에서 모바일 환경으로 옮겨 오면서 마음으로 방황하게 됐고 설 자리가 없어졌다 싶은 것도 있었죠. 2년 정도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슬럼프였어요. 어떻게 좋은 글을 쓸까 생각하면서도 은퇴해야 하나 싶었죠. 출판사 분이 달래서 근근히 글을 쓰던 중에 출판사 측에서 카카오페이지의 ‘기다리면 무료’에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들어간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나온지 한참 된 구간을 넣어서 이번에도 실패하면 정말 낙동강에 가서 수온 재봐야 하는 것 아니냐 싶어서 말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내 생각과 완전히 달랐고 말 그대로 조회수가 날아다니더라고요. 그 이후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고요. 왜, 어느 유통업계 회장이 어렵게 일군 지점만 보면 눈물 난다고 하잖아요. 나도 그래요. 길 가다 노란색만 봐도 ‘심쿵’하고 카센터의 ‘카’만 봐도 절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은퇴를 생각하던 시기 일어난 반전. 게다가 인기에 힘입어 드라마까지 만들어지면서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정 작가 표현에 따르면 ‘이번 생에 이룰 거 다 이뤘구나’ 싶었던 순간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의 캐릭터들이 실사로 움직일 것이란 말을 듣고 너무도 설렜다. 정 작가는 드라마를 보고서야 자신이 왜 계속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했다. 가족들과 함께 모여 앉은 TV, 그 안에서 자신이 만들었던 가상인물들이 숨을 쉬고 말을 하고 걸어다니는데 ‘이거구나’ 싶었다고. 그는 “살다 보면 뭔가를 계산하고 따지고 하겠지만 정말 글 쓰는 데 있어선 그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재고 따지다 보니 중요한 걸 놓쳤던 거죠. ‘쓰는 내가 재밌어야 한다’는 것, 그걸 깨달았어요”라고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단순한 성공, 그 이상의 가치를 전해줬다고 밝혔다.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 '남주를 만드는' 여주인공의 가치

그러나 이 작품이 이룬 성공은 아직도 얼떨떨하다는 것이 정 작가의 솔직한 생각이다. 올해로 꼭 데뷔 10년차가 된 그는 로맨스 소설 작가에서 이제 웹소설 작가로 불린다. 종이책에서 모바일 환경으로 넘어오며 실패와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잘 안착했다. 오히려 새로운 환경에서 성과를 내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임에도 여전히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왜 인기를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작가인 본인도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 마음을 올해 초 새로 펴낸 애장판 표지 속 물음표와 같다고 설명하는 그. 그러나 이 작품에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를 넘어선 공식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재벌인 남자주인공과 신분상승을 하는 캔디형 여주인공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재벌인 남자 주인공이 멋져지는 건 여자 주인공 덕이다. 로맨스에 남녀간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싫었던 정 작가의 풀이법은 남녀 평등을 어느 때보다 갈구하는 이 시대의 욕망과 맞아떨어졌다. 

‘수동적 여주인공에서 탈피하고 싶었다’는 그의 바람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자 정경윤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정 작가는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며 약사를 그만뒀는데 글을 쓰겠다는 생각보다는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그러면서도 글 쓰는 일은 그만두지 못했는데 당시 한 생각이 ‘이거라도 안하면 정말 주부만 된다’였다고 한다. 아내 정경윤, 엄마 정경윤에서 벗어나 글 쓰는 동안 오롯이 ‘정경윤’으로서 살아있다는 걸 느꼈다고. 

그러나 자신을 살아있게 한 글쓰기는 약사 출신이란 이력 때문에 도리어 안정적 직업을 둔 이의 취미활동 정도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정 작가는 “주변에서도 ‘나도 글이나 좀 써볼걸’ 이런 말씀들 많이 하세요. 10년 동안 얼마나 괴로웠는데요. 좋아하는 일도 하려 하고 일상도 지켜야 하고 애들 피해도 안 주려 노력하다 보니 정말 개인 시간이 너무 없었어요. 누구나 주어진 환경이 다르죠. 내게 돌파구는 글이었어요. 인생이 윤택해지는 돌파구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요. 다만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똑부러진 답변을 내놨다.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최선을 다했기에 가족도 세상 누구보다 작가 정경윤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있다. 처음 약사를 그만둘 때 아쉬워했던 남편은 정 작가보다 드라마 첫방을 더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고. 특히 남편이 한 말은 잊을 수가 없단다. 그는 “남편도 약사인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난 죽으면 아무것도 안 남지만 넌 죽으면 이름이라도 남겠구나’라고 했어요”라며 자신의 꿈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남편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다만 아이들의 반응은 곤란할 때도 있다.

“큰 애가 초등학교 5학년인데 자랑도 하고 하는 모양이에요. 친구가 작가가 꿈이라 하니 ‘너 작가 하려면 우리 엄마처럼 손가락 안 보일 정도로 키보드 칠 수 있어야 해. 그럴 수 있어?’라고 하더라고요. 자꾸 자기 이름을 주인공으로 써달라는데 어휴, 못써요. 감정 이입해서 글을 쓰는 스타일인데 베드신이라도 나오면 어휴…(웃음)”

가족들이 꿈을 인정해줬다면 대중은 소설, 웹툰, 드라마로 오기까지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 한결같은 호응으로 성공을 안겨줬다. 사실 이 작품에는 흔히 말하는 막장코드나 고구마(답답한)전개가 없고 그 흔한 악역조차 없다. 요즘 트렌드와 정반대 길을 걷고 있음에도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러죠? (웃음) 편하게 읽으실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자극적 요소들이 많지 않아서요. 사실 로맨스 소설 공식으로 보면 이성연으로도 삼각관계가 갔어야 하는데 나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에요. 내가 원했던 이상적 연애의 모습을 그려가는 것이랄까요. 특히 모든 창작자가 책임감을 가지고 있겠지만 스스로 도덕적 기준이 더 타이트합니다. 그래서 악역이 있는 게 힘들어요. 대부분 해피엔딩이기도 하고요. 내 표현에 너무 제한을 두려 하지는 않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더 공부하게 되고 더 조심스럽게 쓰게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소설이 웹툰화됐고, 웹툰까지 인기를 얻으며 드라마화됐다.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지나가는 비, 낮에 나온 달’과 ‘크리스마스의 남자’ 두 작품도 드라마 제작 가능성을 엿볼만 하다. 정 작가 역시 이 두 작품을 드라마화 됐으면 좋겠는 작품으로 꼽기도 했다. 이에 더해 그는 만약 자신의 작품이 또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영준을 완벽하게 소화한 박서준이 주인공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박서준을 처음 봤을 때 ‘사람이 아니구나’라 생각했다는 정 작가는 “사실 (박서준을) 만나보기 전까진 우리 아들이 박서준 씨처럼 자라줬으면 했는데 실제로 보고 나서는 ‘넌 안되겠구나’ 냉정히 생각했습니다”라는 말로 박서준이 명백한 페르소나임을 밝혔다. 박민영에 대해서도 인격적으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는 그는 박서준과 박민영이 열애설에 휩싸였을 때 순수한 팬심으로 ‘정말 잘 어울린다. 결혼까지 갔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을 정도란다.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사진=카카오페이지 제공)

■ 올해 신작발표 미뤄져…초심으로 다시 시작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 가족 이야기를 할 땐 영락없는 이웃 아줌마지만 글쓰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진중하다. 정 작가는 글쓰는 이들 누구나 바라는 성공을 이뤘지만 스스로는 앞으로 계속해서 글을 써나가는 게 진정한 성공이라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이같은 소신은 제 2의 정경윤을 꿈꾸며 글을 쓰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정 작가는 창작을 꿈꾸는 이들에게 “시장이 너무 커지면서 과열되기 시작하고 이 때문에 글을 쓰는 이들도 덩달아 조급한 것 같아요”라며 “사실은 이게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즐기지 않는 한은 끝까지 가기 어려운 직업인데 너무 조급한 것 같아요. 여유를 좀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단, 즐기면서 쓰되 하루 얼만큼이라도 글을 쓰는 지속성이라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글쓰는 일이 생활 패턴으로 자리잡는 게 연재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보물입니다”라고 진심어린 조언을 전했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안겨준 희열에 취한 것 같다고 냉정한 진단을 내린 그는 스스로를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 새 작품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올해 말 신작을 발표하겠다던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몇 번 엎었어요. 시놉시스 설정을 두어 번 바꾸기도 했는데 스스로 마음에 안들어서요. 재미도 재미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김비서가 왜 그럴까’ 영향이 아주 없진 않아요. ‘김비서가 왜 그럴까’도 내가 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준을 거기에 맞추면 이후 작품활동을 못하겠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을 아주 버리고 다른 글을 쓰는 건 아직 안돼서 올해까지는 일단 머리를 비우자, 선을 그어둔 상태입니다. 알아보는 분도 많아지고 성공, 성공하니 일단 랜선부터 끊었는데 내 일상부터 지켜야 앞으로의 정경윤 작가가 이어져 나갈 것 같더라고요”

작가답게 세심한 감정으로 대중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정 작가는 독자들의 사랑을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보물’이라 표현한다. 그 마음에 보답하는 것은 좋은 작품이라 답하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어렵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며 10년 동안 매일 글을 써왔다. 그렇기에 연말의 약속은 미뤄졌지만 아쉬워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잇는 작품이 아닌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잊게 만드는 작품을 들고 올 것이 자명하기에.

저작권자 ⓒ뷰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