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대산석유화학산업단지 (사진=서산시)

■ 확장 멈춘 산업, ‘버티는 능력’이 CEO 성과

2026년을 앞둔 인사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변화는 ‘정리형 CEO’의 전면 부상이다. 성장 전략을 설계한 인물보다, 사업을 접고 설비를 줄이며 조직을 재편할 수 있는 리더가 선택받았다.

구조적 공급과잉, 원가 상승, ESG 규제, 지정학 리스크가 동시에 작동하는 환경에서 기업들은 더 이상 확장을 전제로 한 경영을 설계하지 않는다. 대신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가 CEO의 핵심 역량이 됐다.

석유화학 업계는 정리형 CEO의 등장이 가장 빠르게 확산된 영역이다. DL그룹은 지난해 8월 DL케미칼 김길수 사장을 여천NCC 신임 공동대표로 선임했다. 여천NCC는 2022년 이후 누적 영업손실이 7758억 원에 달했고, 부채비율도 300%를 웃돌며 유동성 위기가 현실화된 상태였다.

DL은 그룹 내 최고 수준의 화공 엔지니어로 평가받는 김 대표를 투입해 경영 정상화에 착수했다. 취임 직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로부터 각각 1500억 원씩 총 3000억 원의 긴급 자금을 수혈받아 부채비율을 200%대로 낮췄고 동시에 장기 원료 계약 재조정과 설비 합리화를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 적자가 상수가 된 석유화학…‘경영 정상화’가 첫 과제

롯데케미칼은 2022~2024년 누적 영업적자가 1조2,000억~1조3,000억 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한때 연간 1조 원대 영업이익을 냈던 회사가 3년 연속 적자에 빠진 배경에는 중국발 공급과잉에 노출된 기초유분 중심 구조와 확장 일변도의 투자 후유증이 자리한다.

롯데는 지난해 말 대규모 임원 인사를 통해 화학군을 재편했고, 현재는 신동빈 회장–이영준 대표의 2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영준 대표는 취임 이후 대산 석유화학단지의 나프타분해설비(NCC)를 HD현대케미칼과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안을 주도했다. 해당 개편이 완료되면 연간 약 110만 톤의 에틸렌 생산능력이 감축될 전망이다.

롯데케미칼은 일본 레조낙 지분 매각(2750억 원), 미국 법인 지분 활용(6600억원), 인도네시아 법인 PRS 계약(6500억원) 등을 통해 총 1조3000억원 규모의 유동성을 확보했다. 2030년까지 스페셜티 비중을 매출의 60%로 확대하고, 범용 제품 비중은 30% 이하로 낮춘다는 계획이다.

LG화학은 지난달 신학철 부회장의 퇴임과 함께 김동춘 사장을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지난해 화학부문 영업손실은 1358억 원으로 전년 대비 적자 폭을 줄였지만, 올해 3분기 석유화학 부문 영업이익은 290억 원에 그쳤다.

첨단소재 출신인 김 대표는 범용 석화 비중을 줄이고 소재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LG화학의 이번 인사는 대규모 투자를 통한 반등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체질 개선에 방점이 찍혔다는 평가다. 성장형 CEO에서 정리형 CEO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인사다.

■ “누가 성장할 것인가”에서 “누가 손실을 멈출 것인가”로

2010년대 기업 경영의 키워드는 단순했다. 투자하면 성장했다. 설비를 늘리고, 해외 공장을 짓고, 인력을 확충하면 외형은 커졌고 시장은 이를 기업가치로 보상했다. 조선·철강·화학·정유산업에서도 ‘얼마나 크게 베팅하느냐’가 경영자의 역량으로 평가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2020년대를 거치며 이 공식은 무너졌다. 팬데믹, 지정학 리스크, 고금리와 환율 변동, 탈탄소 규제가 겹치며 투자는 더 이상 안전한 선택이 아니게 됐다. 설비는 고정비가 됐고 차입은 리스크로 돌아왔다. 수요는 예측 불가능해졌고, 글로벌 공급망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변수가 됐다. 이제 기업가치를 가르는 것은 확장의 속도가 아니라 ‘정리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