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환 금융위원장과 이복현 금감원장./자료=연합뉴스
#. 9월 대구에서 강릉으로 이사를 준비하던 박모씨 집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전세계약을 하기 위해 1억원 정도 대출이 필요한데, 예상과 달리 대출 승인이 나지 않은 것. 박씨는 처음에 대구에 있는 주거래은행인 농협을 찾았다가 '대출 불가'라는 답을 받았다. 당황해 농협 강릉 지점도 방문했지만 역시나 '불가'. 부랴부랴 가까운 국민은행에 상담을 받았더니 "무난하게 승인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씨는 "은행마다 금리가 다른 것은 이해해도, 수도권도 아니고 갭투자 매물도 아닌 집을 두고 은행마다 대출 여부가 제각각인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답답해했다.
#. 우리은행 마이너스 통장을 쓰던 김모씨는 최근 한달 내로 마이너스 대출을 모두 갚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기존에 갖고 있던 현대해상 주택담보대출금을 늘려 마이너스 통장을 없애려 했지만, 현대해상에선 원하는만큼 추가 대출이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 김씨가 고소득자이긴 하나, 이직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아 소득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했다. 고민하던 차에 SC제일은행에서 더 낮은 금리로 대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김씨는 이 참에 주담대를 통째로 갈아탔다. 김씨는 "대출을 상환할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도 우여곡절을 겪으니 허탈했다"고 전해왔다.
최근 은행들이 내놓는 '대출 제한' 조치들이 천차만별이다보니 소비자들 혼란이 커지고 있다. 같은 전세 매물을 두고도 어느 은행은 되고, 어느 은행은 안되니 은행들 뺑뺑이를 도는 경우도 잦아졌다.
'신용대출'도 다를 바 없다. 은행마다 대출자를 '평가'하는 기준이 상이하다 보니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식 대출이 이어지고 있다.
시발점은 지난달 25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 대출에 대한 당국 개입을 시사하면서 현장 혼란이 시작됐다. 금감원이 칼을 빼들자 은행들은 부랴부랴 '가계대출 줄이기'에 나섰다. 문제는 금감원이 일관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자, 은행마다 제각각 제한 조치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주담대 제한으로 시작된 '대출 조이기'는 신용대출로 확대해가는 모양새다. 금융당국은 개인 신용대출에 소득대비대출비율(LTI)을 적용해 한도를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수시로 바뀌는 금융 정책으로 소비자들은 과거부터 트라우마라 할만큼의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국민들의 전재산이라고 할만한 부동산을 두고 금융당국이 간담회나 인터뷰에서 흘리기식으로 언급하는 것은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또 다른 문제는, 가계부채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일련의 금융정책들이 실수요자 및 대출 상환 능력이 충분한 건전한 금융소비자들 선택의 기회마저 박탈하고 있다는 것. 김씨의 사례처럼 '고신용, 고연봉'자의 대출 거절 사례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신용점수가 높더라도 대출 승인을 거절당할 수는 있지만, 그 빈도가 너무 높아지면 금융시스템 작동 방식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신용평가'에 좀 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신용점수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 주요 신용평가사 모두 900점 이상인 고신용자가 40%를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현재 '신용 인플레'가 제기된 상황이다.
한편 유명무실화된 '신용점수'의 대안으로는 '금융 마이데이터'의 적극적인 활용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마이데이터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보유한 기업·기관에 그 정보를 당사자가 원하는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요구할 수 있는 서비스다. 금융과 공공분야에선 이미 도입됐고, 내년 3월에 정식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현재 마이데이터는 고객이 주기적으로 정보 제공에 동의한 경우에 한해 활용이 가능하다. 금융소비자는 주기적인 정보 제공에 소극적이고, 대형금융회사는 각사가 보유하고 있는 고객 정보를 타사와 공유하기를 꺼릴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대기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신용점수 실효성 제고방안' 브리프를 통해 "신용평가사의 신용점수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으로부터 대출 승인을 거절당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신용점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며 "향후 신용점수 평가에 있어 마이데이터의 활용 범위와 비용 부담 등 사회적 합의 도출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