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짝퉁 포토카드 단속 현장. /사진=연합뉴스
"저도 제가 포카(포토카드)를 살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너무 예쁜 사진을 보면 사고 싶어지더라고요. 랜덤박스를 까보는 순간에 중독된 것 같아요."
god를 시작으로 BTS를 거쳐 온앤오프 덕질로 넘어온 한 후배의 얘깁니다. 그는 고가의 콘서트 티켓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지만, 앨범 구매량 순으로 입장한다는 팬 사인회에는 투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20년 차 팬질로 쌓은 나름의 경제학이라는데요. 그런 그가 뜻밖에도 포카가 든 랜덤박스를 사는 것만은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랜덤박스 속에 내가 원하는 그 포카가 들어있기를 기도하면서...그렇게 후배는 랜덤박스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랜덤박스를 사는 사람들은, 설령 마음에 안드는 아이템이 나오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랜덤박스를 뜯어보는 그 순간 자체에 '돈을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리에 빠지면 랜덤박스에 숨겨져 있는 '사행성'은 들여다 보기 어려워집니다.
책 '당신이 몰랐으면 하는 K-게임 사행성의 비밀'에서는 랜덤박스나 확률형 게임 아이템의 원형으로 파친코를 듭니다. 각기 달라보이지만 소비자의 심리를 지배하는 여러 요소들이 '사행성'에 기대있다는 분석입니다. 책에 따르면 게임 회사 넥슨은 '사행성' 시비를 피해가기 위한 특허까지 갖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게임 아이템 때문에 살인까지 벌어지는 현상도 이상한 일만은 아닙니다. 랜덤박스는 확률형 게임 아이템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사행성'을 띄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행성'을 신경학적으로 접근하면 '변연계 자본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변연계는 주로 감정과 행동, 욕망 등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데, '변연계 자본주의'는 '쾌락 중독'을 목적으로 한 기업들이 쓰는 전략입니다. 뇌에 단발적인 강력한 쾌락을 줘 이를 계속 추구하고자 하는 습관을 설계하는 방식입니다.
결과적으로 랜덤박스는 '사행성 도박'과 유사한 지점에 있습니다. 최근 청소년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온라인 도박이 아주 단순한 홀짝 게임이나 랜덤박스 방식을 취하는 것이 우연이 아닌 셈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팬덤에게 아티스트 아이템을 판매하는 방식이 '랜덤'에 기대어 있는 상황은 우려할 만 합니다. 기업들이 자사제품 마케팅에 너도나도 '랜덤'을 도입하는 것도 부작용은 없는지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법조계에서는 랜덤박스 판매 시스템 상 소비자에게 손실을 주는 것으로 해석될 경우 형법상 '도박과 복표에 관한 죄'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는 해석도 내놓습니다. 복표는 우연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는 의미로, 도박에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설명입니다. 랜덤박스가 '돈을 쓴 것'이 아닌 '돈을 잃은 것'이 되는 순간 모든 도식은 변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팬덤도 아티스트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최근 BTS 팬덤인 아미와 세븐틴의 팬덤 캐럿을 중심으로 #하이브 불배, #탈하이브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한 예입니다. 이들은 "우리는 더이상 ATM기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돌 세븐틴의 멤버 승관은 자신의 SNS에 "우리는 당신들의 아이템이 아니다. 맘대로 쓰고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팬들은 수십장씩 사던 아이돌 앨범을 '구매 취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음악 앨범은 단 한장이면 됩니다. '변연계 자본주의'에 재설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