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장 흥분시키는 물건이 있다면, 시계다.

스마트워치 시대에 손목시계 산업은 더 이상 기술적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산이다. 무브먼트의 소재와 기술은 기계식 시계에 필연적인 시간 오차를 줄이려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그 작은 나사와 톱니들이 안간힘을 쓰며 서로를 도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고작 시간을 측정하는 일이라니...하찮음과 숭고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물건이다.

따지고 보면 1년을 365일로, 하루를 24시간으로, 1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분절시킨 것부터가 무모한 일인데, 그 계량과 측정을 조금이나마 더 정확히 해보겠다며 인간이 들인 노력이 위대하면서도 가엾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된 명사 중 말과 글 모두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많은 단어 1위는 ‘time’이라고 한다. 심지어 3위가 ‘year’, 5위는 ‘day’라고 하니, 사실 우리는 시간에 대한 관념과 강박을 항상 품고 사는 존재들인 셈이다.

최근 강연을 할 일이 있었다. 강연 장소가 익숙한 곳이었기에 시간대와 교통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늦지 않게 버스를 탔다. 그러나 도착을 다섯 정거장 가량 남기고, 기사분이 뭔가 버스의 이상을 감지한 것 같았다. 버스는 도로에 정차를 했고, 내려서 차체를 이리저리 살펴본 기사분은 다시 버스에 올라타 난감하다는 투로 승객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차에 이상이 생겨서 뒤에 오는 버스를 이용해주셔야겠습니다.”

시계를 보니 강연 시작까지 45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설마 늦지는 않겠지...’

하지만 뒤에 온다던 버스가 소식이 없었고, 택시도 잡히지 않는 20분이 흘러갔다. 과장 없이, 나는 그 20분 동안 내가 맞이할 최악의 상황을 20가지 이상 생각해냈다.

이대로 예정된 강연 종료 시점까지 도로에 갇히면? 연락 두절이 되어야 하나? 늦게라도 도착해 눈총을 받으며 강연을 하는 것이 맞을까? 강연료를 받지 않겠다 선언하면 용서가 될까? 지금 이 상황을 모두 상세하게 사진으로 찍어 담당자에게 보내며 구구절절 사정을 해볼까?

진땀을 흘리며 애꿎은 손목시계를 대략 200번쯤 확인했을 때, 뒤에서 버스가 도착했고, 다행히 별다른 정체도 없어 곧 강연 장소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바싹 마른 목에 물을 들이부으면서 손목을 보니 강연 시작 5분 전, 순간 갑작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내 손목에 시계가 없었다면, 버스 안에서 나의 불안은 커졌을까? 아니면 작아졌을까?’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2018) / 사이먼 가필드 / 다산초당


<2005년 12월 31일 자칭 ‘코나콩’이라는 저항 단체는 프랑스 낭트 인근 작은 해변마을에 모여서 다가오는 2006년을 막으려고 했다. 모인 인원은 고작 100여명. 그들은 2005년은 별 볼일 없는 해였지만, 2006년은 더 나빠질 가능성이 많으므로 상징적인 의미에서 시간을 멈추자는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손목시계를 망치로 부수는 퍼포먼스를 했다. 하지만 시간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들은 이듬해 같은 장소에 다시 모였고 죄 없는 시계만 또 박살냈다. 그러나 시계는 세상 어디에든 있고 여전히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2018) / 사이먼 가필드 / 다산초당

탄핵 찬반부터, 국제적인 관세 전쟁까지. 대선을 앞두고 각종 정치적 견해 차이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나 무려 시간을 멈추려는 자들과, 더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려는 이들이 함께 숨 쉬며 사는 곳이 이 세상이다. 무한한 시간 앞에서, 고작 한국의 보수/진보간 대립은 그저 ‘짜치는’ 갈등이라 여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선욱 레디투다이브 대표

■출판사에서 10년간 마케팅을 하며 <소행성책방>, <교양만두> 등의 채널을 통해 지식교양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현재 출판사 '레디투다이브'의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