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부터 최근까지 언론은 연일 숨넘어가는 경고 사이렌을 울려댄다. 지정학적 긴장과 불안은 여전하고, 미국 우선주의의 트럼프 정부가 촉발시킨 관세전쟁이 갈등만 키우는데, AI같은 파괴적 기술은 마구 달리는 종목의 말에만 올라탄 듯하다. 발길 끊은 고객이 다시 밀려들 때는 언제일 지, 하루 버티는 것 자체가 힘든 이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매일이다.

사회적 양극화는 굳이 전문가들 TV토론이 아니어도 증권시장과 전통시장에 며칠만 있어 봐도 절감할 수 있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와 업계가 제시한 분석에 의하면, 올해 폐업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작년 발표 수치(98만6487명)도 2006년 통계 집계 이래 사상 최고치였으니,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비롯해 투자 가뭄에 속이 타는 초기 스타트업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생존 투쟁인 것이다. 이들에게 과연 ‘고령화 시대의 노후 대비’, ‘AI시대의 투자전략’ 같은 사회면과 테크 기사들이 얼마나 눈에 들어올까. 얼마 전 비슷한 문제의식을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규명한 책이 나와 재미 있게 읽었다.

■ 생존이 걱정인 이에게 AI·재테크는 '언감생심'

샌딜 멀레이너선(하버드대 경제학 교수)과 엘다 샤퍼(프린스턴대 심리학 교수)가 쓴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SCARCITY: why having too little means so much)」는 돈, 시간, 음식, 인간관계 등 우리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모든 결핍이 인간의 인지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 책이다. 저자들은 극심한 결핍이 우리의 주의를 강하게 사로잡는 ‘터널링(tunneling)’이라는 현상을 발생시켜, 부족한 자원과 관련된 문제에 온통 집중하게 함으로써 다른 중요한 사안을 간과하며 장기적 목표에 소홀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화재 현장으로 급히 출동하는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이 아닌 안전벨트 미착용 등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율이 20~25%에 달한다는 결과라든가, 가난한 이들이 보험료 납입 청구서들을 고리대금으로 돌려막다 결국 보험도 해지하고 미래에 수수료 빚까지 늘리는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는 것 등 충동적이고 좁은 시야에 무의식까지 점령해 버린, 미래를 위협할 결핍의 행동들을 심도 있게 규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줄어들지 않는, 그것도 큰 실수의 대부분은 부주의함이 아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나 결핍 자산에 사로잡힌 터널링 현상이 근본 원인이라는 점을 여러 사례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우리의 악순환을 찾아봤다. 역시나, 지난해 기준 보험계약 유지율은 1년(13회차) 87.5%, 2년(25회차) 69.2%로 계약의 30%가 2년 내 해지됐다. 5년(61회차) 유지율은 46.3%에 불과했다. 올 1분기 기준 자영업자 대출은 1112조원으로 2019년말(738조원)에 비해 50%가 넘게 증가했고, 빚이 있는 자영업자 수는 335만명으로 전체 자영업자(570만명)의 3분의 2에 달했다.

■ 극심한 결핍은 합리적 선택을 가로막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복잡한 현실 세계에서 경제 전반의 침체와 복합적 위기로 인한 경제적 결핍이야 한 두 가지 대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저자들이 제시한 몇 가지 방법과 대안적 사례들은 눈여겨볼 만하다. 핵심은 일단 ‘터널’에서 빠져나와 ‘느슨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결핍’을 일시적으로 해소해 주는 일회성 현금의 공급만으로는 ‘결핍의 덫’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며 그 함정을 벗어나기 위한 저금리 대출, 유동자산 예금 계좌, 보험 등 완충 수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울러, 행동과 환경을 구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강제적 느슨함’을 도입하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제시했다.

세인트존스의 어느 병원은 32개의 수술실이 늘 만실이었고, 응급 상황이 종종 발생해 갑자기 변경된 수술 일정으로 의사들은 몇 시간을 기다렸다 수술하는 일이 잦았다. 직원들 역시 추가 근무에 시달렸고, 공간과 시간의 결핍이 악순환을 부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초빙 자문관은 병실 하나를 통으로 비웠는데(의사들은 부족한 수술실 상황이 악화된다며 반발), 응급 상황들이 기존 수술 일정을 거의 침해하지 않으면서 높아진 효율성은 수술 건수를 5% 이상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 어느 주에서는 입사할 때 가입 거부 신청을 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퇴직연금에 가입하게 해 당장의 쪼들림에 의한 터널링이 미래 대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해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경영자들 대다수가 당장의 수익에만 집중(터널링)하다 금융위기를 맞았음을 고려해 많은 은행들은 ‘리스크 담당 최고책임자(Chief Risk Office)’를 도입했는데, 이 또한 ‘강제적 느슨함’의 대표적 사례다.

기업경영뿐만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도 이런 사례는 확인된다. 저소득층에게 대학 등록금을 지원하는 어느 지역에서는 결핍으로 눈앞의 일들에 급급한 이들이 복잡한 서류제출을 미루다 번번이 지원을 놓치고 있음을 파악했다. 이에 대책으로 등록금 지원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서류 작성까지 한 번에 안내해 줌으로써 이들의 대학 진학률을 몇 배 높일 수 있었다. 이 역시 터널링에 빠진 이들이 어려워하는, 사소하지만 장기적으로 꼭 필요한 것을 도와 좀 더 근본적이고 미래를 대비하는 중요한 일을 하게 한 성공 사례다.

■ 결핍은 창의적 문제해결의 자산인데…

그런데 창의와 혁신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다른 다수의 연구들에서는 자원과 시간의 제약이 오히려 창의적 문제해결과 혁신의 촉진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례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다. 예산의 제약을 받는 민간 기업이 우주 진출의 원대한 꿈을 키우며 국가 기관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로켓 재사용이라는 방법을 개발해 우주탐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시켰다. 또한 젊은 층이 애용하는 인스타그램의 경우,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기 바쁜 당시 경쟁사와 차별화해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한, ‘사진’과 ‘간단한 필터’의 최소 기능만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최근 글로벌 비즈니스 혁신 트렌드 중에는 리버스 이노베이션(Reverse Innovation)이란 현상이 있다. 기존에는 늘 선진국에서 개발된 혁신이 개발도상국으로 확산되었으나, 제한된 자원과 환경의 개발도상국에 맞게 불필요한 기능과 비용을 줄여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경쟁력을 갖추고 역으로 선진국 시장으로 확산되는 현상이다. GE가 중국을 겨냥해 만든 휴대용 초음파 기기가 저렴한 비용과 편리한 사용으로 미국과 유럽의 응급실이나 구급차 등에서도 널리 사용된 바 있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이다. ‘결핍’은 누구에게는 옆도, 멀리도 못 볼 만큼 사고의 터널에 갇히게 하는데, 어떤 이에게는 기존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작용해 보다 큰 효용과 성취를 가져오기도 한다. 무슨 차이일까.

나와 늘 함께 하는 AI친구에게 물어봤다. 스마트한 그 친구의 첫 번째 답. 적당한 부족은 (‘72시간 이내 마감 시간 제한시 작업 효율성이 40% 올라간다’와 같은) 데드라인 효과를 가져오고 자원 부족 상황에서 느끼는 절실함이 혁신의 강력한 동기가 되어 실제로 필요한 변화와 혁신을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반면, 극심한 결핍 상황에서 개인은 인지적 대역폭이(이게 소위 터널링이다) 크게 감소하고, 당장의 다급함에 단기적 사고에 갇히기 쉬우며, 따라서 실수를 빈번히 저지르고 생산성의 저하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답은 개인차. 성격이나 회복탄력성 등에서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부족함을 도전으로 여기나 두려움이 큰 사람은 쉽게 압도당한다는 것. 주변의 지원이나 지식, 약간의 여유 등이 있으면 혁신이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세 번째 답이었다. 오호, 추론 능력이 나날이 발전한다더니만, 상당히 참고할 만한 설명이다.

■ 터널 탈출 위한 '사회적 느슨함' 고민해야

종합해 보자. 개인 혼자의 힘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극심한 결핍은 사고를 제약하고 중차대한 실수까지 반복하게 하는 어두운 터널로 끌고 가는 반면, 적당한 결핍이나 누군가와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제약 여건은 ‘다르게 생각하기’와 ‘협력’을 통해 혁신과 더 큰 기회를 창출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기실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정답이란 것은 없다. 다만, 결핍의 두 얼굴을 통해 살펴본 문제의식은 가야 할 방향을 찾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곧 2차 편성된 추경이 내려올 것 같다. 극심한 결핍의 터널에 갇혀 장기적인 미래와 보다 잘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 이것이 숨을 돌릴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다만, 일회성 자금 지원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잘못된 방향을 전환(Pivot)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주체들은 ‘결핍’과 ‘제약’을 보다 나은 해법을 찾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 것이며, 이를 돕는 정부와 기관, 각 주체들은 단순 지원만이 아닌 사고와 행동의 패턴을 바꾸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 작더라도 의미 있는 성공의 단초를 찾고 확산하는 방안들을 다각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 법학박사로 국회, 청와대, 공공기관을 두루 거치며 교육, 과학기술, 창업 정책을 다뤘다. 교육정책에 매진했을 당시에는 하나의 정책에 얼마나 많은 이해와 갈등이 얽히고설킬 수 있는지 깊이 체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재직 시절엔 ‘창의교육’과 ‘교육기부’에, 창업진흥원에서는 ‘창업’과 ‘혁신’에 꽂혀 정부정책과 현장 사이에서 동분서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