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 스웨덴의 발렌베리 본사 앞은 시위대 항의로 소란스러웠다. 시위대는 발렌베리 가문이 장악한 대기업들이 나라 경제를 독점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로 전가하는' 행태에 대해서도 분노를 드러냈다. 반기업적 사회 분위기가 계기가 된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이 시기 스웨덴 정부는 대대적인 세제개혁에 착수했다. 상속세 최고 세율이 80%를 넘기면서 발렌베리 같은 대기업이 대를 이어 기업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목전에 놓였다.

당시 스웨덴 대기업 절반 이상이 발렌베리 가문의 직간접적 지배 아래에 있었다. GDP의 약 40%가 이 가문이 지분을 보유한 기업에서 나왔다. 발렌베리 가문의 선택에 스웨덴의 미래가 달려 있는 절체절명의 시기다. 이들은 회사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로 했다. 사유재산으로서의 기업지배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가문의 지분을 비영리 공익재단에 넘기고, 재단을 통해 기업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새로운 경영구조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발렌베리는 기업 지배권을 유지하면서도 상속세 문제를 해결했고, 공익적 투자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냈다.

발렌베리 가문의 변화는 단순히 세금 회피에 그친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 사적 자산으로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만 인식되었던 '기업'을 사회 전체의 목소리와 이익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적 장치로 보는 획기적인 시각의 변화가 뒤따랐다. 이제 기업은 더 이상 주주만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닌 것이 됐다.

발렌베리 사례처럼, 현대 기업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모든 이해당사자(근로자, 소비자,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로 기능해야 한다. 기업이 이해관계자들의 요구를 균형 있게 충족하지 못할 경우, 반기업적 정서 확산, 과도한 규제로 인한 경영환경 악화, 나아가 국가 경제의 위축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불안을 낳고 기업 생태계를 파괴하며, 국가 경제의 지속 가능성까지 위협할 수 있다. 범세계적인 ESG 조류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업은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주체로 변화하고 있다.

한국의 재벌 시스템은 경제 성장기에 자본 집중을 통해 급격히 성장했다. 정부 규제와 세제 혜택을 받으며 대기업들은 산업을 지배했고, 이들이 한국경제 성장의 주역이 됐다. 하지만 이런 대기업 중심 구조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낳는다. 순환출자와 일감 몰아주기, 사익 편취, 부당경쟁 등의 문제는 대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켰고, 사회적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승계 과정에서의 불투명한 행위와 편법적 세습 또한 재벌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켜 왔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주주자본주의를 주장하며, 전문 경영인 중심의 기업 운영을 선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인 없는 기업시스템도 여전히 문제다. 2006년 아르셀로 미탈이 포스코 합병을 시도했을 때, 전문 경영인 체제의 포스코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면 포스코는 인수합병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주인 없는 기업의 책임 부재와 무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재벌 시스템은 주인 있는 경영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부분이 있다. 초기 창업자들이 보여줬던 동물적 이익 추구와 창의성, 수단을 안 가리는 집요한 목적 지향성 등은 우리경제가 기적적인 속도로 성장하는데 핵심적 기여를 했다. 물론 지금의 3~4세 경영자들도 그러한 덕목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창업 세대가 보여줬던 사회적 리더십과 혁신성, 성공에 대한 의지를 새로운 오너계층에서 찾아보긴 쉽지 않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부도덕적 행태, 대기업 지위를 이용한 주변 생태계에 대한 갑질, 안전 위주의 축소지향적 경영 등으로 국민들의 불안과 불만을 초래하는 사례가 더 흔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재벌 시스템도 이제 새로운 거버넌스로 이행할 전환점을 앞두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 사례처럼, 주인 있는 경영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다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기업의 소유와 경영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 사회가 재벌 시스템의 기업지배를 용납하는 것은 그것이 국가사회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해 왔기 때문이지 많지 않은 지분과 순환출자로 이뤄진 소유구조가 '신성한' 사유재산권이기 때문은 전혀 아니다. 과거 방식을 탈피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혁신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한국형 기업 거버넌스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또한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존경받고 보호받는 기업경영이야말로 노사갈등과 환경, 안전규제, 각종 준조세 등으로 얼룩진 우리 기업현장이 미래를 개척해 낼 수 있는 지속가능한 길이다.


박원주는 현재 중앙대 특임교수이자 삼성증권 사외이사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를 나와 행시 31회로 공직에 들어섰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정책과 에너지, 자원분야를 주로 담당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청와대 산업통상자원비서관으로, 문재인 정부에선 특허청장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을 자처하는 경제수석 당시엔 주로 기획재정부나 교수 출신이 선임돼 온 관행을 깨고 산업부 출신으로 처음으로 내정돼 화제였다. 그는 한국 경제와 산업, ESG에 대해 글을 풀어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