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먼 친척 어르신의 장례식에 갔다.
향년 92세. 자주 뵐 기회는 없었지만, 가족을 통해 훌륭한 인품과 지독하리만치 성실했던 고인의 삶에 대해 익히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르신은 1960년대까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최근까지도 명절이면 백발이 성성한 일흔 넘은 제자들이 고인의 집으로 인사를 올 정도로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 고인은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전직을 했고, 서울 양천구의 한 동네에 사무실을 두고 40년 넘는 세월 동안 법무사로 일했다. 음주가무가 좀처럼 몸에 맞지 않았던 고인은 규칙적이란 말로는 부족한, 금욕적이고 정돈된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법무사로 일하면서 연을 맺었던 많은 이들 역시 저마다 그의 인품과 성실함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아흔을 넘긴 이의 죽음이 결코 갑작스러운 소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환이었고, 거동을 못한지도 이미 몇달이 흘렀다. 그래서인지 조문객들도 마치 먹구름을 보고 우산을 챙겨 외출한 이가, 기어이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우산을 펼치듯 담담하게 빈소를 찾았다. 한겨울이었지만 평생 누구에게도 인색하지 않았던 고인 생전 삶의 결만큼이나 빈소는 그를 기리려는 온기로 훈훈했고, 유가족 역시 차분한 얼굴로 때로는 웃음을 띠며 조문객을 맞았다.
그러나 그렇게 예견된 일을 무던히 해내던 가족들의 마음은 저녁 8시쯤 장년의 조문객 4명이 동시에 방문하면서 무너졌다. 그 무리 정체는 고인이 아주 오랜 시간 찾았던 이발소, 수제비집, 한의원, 떡집의 사장이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고인은 생전 수십년간 보름에 한번은 꼭 같은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단정히 정리했고, 좋아하던 수제비 노포를 찾아 “입맛이 없어서 또 왔다”는 무심한 칭찬과 함께 들깨 수제비를 주문했다.
일이 많은 날에는 근처 오래된 단골 떡집을 찾았고, 늘 시루떡을 사서 사무실로 돌아와 먹으며 야근을 했다. 몸이 편치 않다 싶으면 목동의 한 상가에 자리잡은 한의원을 20년간 찾았고, 용하다고 여겼는지 지인들에게도 “그 원장이 침을 잘해!”라며 권했다. 예상하고 대비했지만, 그래서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슬픔이었지만, 고인 생전 일상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함께했던 이 단골집 사장들의 위로 앞에서 유가족은 결국 터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리추얼』(책읽는수요일/2014) 이라는 책에는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의식’처럼 반복했던 일상의 루틴들이 상세하게 소개된다. 익히 알고 있는 위대한 이들의 소소하고도 별난 루틴을 보면서, 인간의 ‘의식적 행위’에는 무거운 삶을 밀고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어떤 힘이 깃든 것이 아닐까...생각한 적이 있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내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을 보면 된다. 『리추얼』 속 인물들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이발은 여기”, “아프면 저기”, “입맛이 없으면 거기” 등 오랜 시간 동안 ‘의식’을 행하듯 일상을 간소하게 만들어 처자식과 직업을 위한 힘을 비축하고, 가족은 물론 주변 지인들에게까지 유무형의 여유를 선사한 뒤 떠난 92세의 어르신은 위대한 사람이었다.
김선욱 레디투다이브 대표
■출판사에서 10년간 마케팅을 하며 <소행성책방>, <교양만두> 등의 채널을 통해 지식교양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현재 출판사 '레디투다이브'의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