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여의도, 금융감독원 직원들이 상복을 입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금감원 내부 모든 조직은 금융소비자보호를 위해 일하는 곳"이라며 정부가 최근 내놓은 금융당국 개편안이 오히려 혼란만 부추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같은 시각, 바로 옆건물인 한국투자증권 본사 앞. 냉랭한 표정으로 이들의 시위를 바라보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전액 손실에 수개월째 금감원 인근에서 시위 중인 벨기에 부동산펀드(‘한국투자벨기에코어오피스부동산투자신탁2호’) 피해자들입니다.

■ 벨기에펀드 투자자들, 4년여만에 전액손실

2019년 한국투자리얼에셋운용이 설계하고 한국투자증권과 우리은행 등이 팔았던 이 펀드는 벨기에 정부 기관이 임차한 브뤼셀 투아송도르 빌딩의 장기임차권에 투자하는 상품입니다. 당시 약 900억원 가량 판매됐는데요. 이후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난 3월 해당 펀드는 유럽 부동산 경기 악화 여파로 선순위 대주단이 만기 채무불이행을 선언했고, 투자자들은 회수금 '제로'라는 황당한 통보를 받습니다.

당시 판매된 대다수의 해외 부동산 펀드가 그랬듯 이 펀드 역시 투자자들 중 상당수는 상품의 위험성보다는 안정적 수익, 해외 부동산 투자 매력에 대해서만 인지했다고 토로합니다. 각자의 상황도, 형편도 모두 다른 피해자들이지만 '이런 결과를 낳을 정도로 위험한 상품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 공통된 주장입니다.

(자료=한국투자벨기에코어오피스부동산투자신탁2호 간이투자설명서 일부 발췌)

투자자들은 도대체 왜 상품의 위험도를 인지하지 못했을까.

운용사가 발간한 약 90페이지 분량의 증권신고서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담겨 있습니다. 해당 상품이 '투자위험등급 1등급'에 해당하는 매우 높은 위험 수준이라는 표기는 물론, 곳곳에 위험 항목들도 나열돼 있습니다. 반면 '신용등급 AA3 안정적' 등급의 벨기에 정부기관이 30년간 100% 장기 임차한 자산으로 연 1회 임대료 인상 예정이라는 점과 주요 실사 결과 등 나열된 내용들을 봤을 때 일반 투자자가 상품 자체의 위험도를 인지하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 펀드 가입시 안내받는 6페이지 분량의 간이투자설명서에도 자금조달에 현지 대출금액이 포함됐다는 내용 등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설명서에 깨알처럼 작은 안내문구들이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거의 담겨있지 않습니다.

투자자들은 운용사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증권신고서와 간이투자설명서 모두 표준약관에 의해 작성됐고 이 신고서들이 고객들 손에 닿기 전 승인한 것 역시 금융감독원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만난 벨기에펀드 투자 피해자 A씨는 "정작 필요한 중요 정보들이 빠진 설명서를 보고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투자자가 어디 있겠냐"며 "금융사 뿐 아니라 이를 관리감독했어야 하는 금융당국도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성토했습니다.

■ '덧대로 덧대고...' 펀드가입 1시간

업계 안팎에선 펀드 가입 과정이 복잡해진 것이 오히려 투자위험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워낙 내용이 많다보니 일부 고객들은 너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걸 꺼리거나 가입 자체를 부담스러워합니다. 한번씩 읽어드려도 모든 내용을 집중해 듣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많아요"라고 전합니다.

실제 당국은 그간 불완전판매 이슈가 반복될 때마다 덧대고 덧댔습니다. 특히 사모펀드 사태가 불거진 것을 계기로 2021년 이후 판매사들은 사실상 모든 투자 상품 판매과정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금감원의 금융사 미스터리 쇼핑 조사 결과에서 확인됐듯 펀드 가입 관련 상담에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1시간을 넘깁니다.

현장에선 탁상 행정이라는 비판도 나옵니다. 대면과정이 복잡해지면서 가입자들도 불편을 호소할 뿐 아니라 소액 가입자들에 대해선 판매사들이 비대면 가입을 추천하고 있어 결국 허울뿐인 절차만 남았다는 겁니다.

(사진=지난 8일 열린 금융투자업계 CEO 간담회 자리에서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모두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연일 소비자보호를 외치고 있는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8일 금융투자업계 최고경영인(CEO)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임직원 스스로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가족에게 자신있게 권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면 판매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자 원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펀드 설계를 맡는 자산운용사부터 판매사까지 모두 소비자 보호에 대해 지속적인 노력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합니다. 해당 상품이 공모펀드로 일반 투자자들에게 판매되기에 적합했는지, 판매과정에서 상품의 위험성에 대한 정보전달이 충분히 이뤄졌는지 등은 반드시 따져보고 개선돼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앞서 수없이 반복돼 온 과정을 이렇게 덧대기만 한다면 결국 '위험고지에 대해 들었음'란에 자필서명한 자신을 탓해야 하는 현실은 반복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만약 이 원장이 해당 펀드의 설명서를 받아봤다면 그는 달랐을까요. 적지 않은 잡음을 거쳐 진행되고 있는 금융당국의 이번 변화가 단순 조직개편이 아니라 실제 금융상품이 투자자들의 손에 닿기 전 수많은 과정에서 걸러지고 투명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