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엘리펀엔터테인먼트)
[뷰어스=손예지 기자] 경력이 길지 않은 배우의 경우, 대중은 그를 작품이나 캐릭터로 기억한다.
기자는 한동안 여회현이라는 배우를 tvN ‘기억’(연출 박찬홍, 극본 김지우) 속 이승호로 기억했다. 2016년 방영된 ‘기억’에서 여회현은 유명 로펌의 후계자이자 비밀을 품은 남자 이승호를 맡았다. 선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그 위로 언뜻 서늘한 눈빛이 스칠 때가 있는 여회현의 얼굴은 극 중 대외적으로 ‘엘리트’라 평가받지만 뺑소니범이라는 과오를 숨기고 사는 승호와 잘 어울렸다.
“그때 실제로 정말 힘들었어요” 여회현은 이렇게 고백했다. 여태 출연한 작품 중 가장 캐릭터에 몰입한 시기였단다. 나중에는 캐릭터 때문에 자신이 우울한 건지, 반대로 자신의 영향을 받아 캐릭터의 우울함이 배가된 건지 모를 정도였다고.
다행히 승호를 연기하는 동안 느낀 울적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후 인기 웹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 시즌3’의 다소 지질하지만 해맑은 아르바이트생 회현이나 KBS ‘란제리 소녀시대’ 속 완벽남 손진 등 밝은 캐릭터를 만난 덕분이다. 이 작품들에서 여회현은 유쾌하고 활발한 면은 물론, 여성 시청자들을 설레게 할 만한 매력까지 소화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 연장선에서 ‘호감형 캐릭터’의 종합판을 만났다. 최근 종영한 KBS2 주말드라마 ‘같이 살래요’(연출 윤창범, 극본 박필주) 박재형이다. 재형은 극 중 준수한 외모와 따뜻한 성품을 지닌 데다 연애에 서툰 모습이 귀엽기까지 한 인물로, 연예계 스타등용문으로 통하는 KBS 주말극의 막내아들 역할이다. 여러 차례 오디션을 거쳐 재형을 맡게 된 여회현은 선택받은 데 대한 고마움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KBS 주말극 막내아들의 인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정작 나는 그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죠. 그보다 고민이 앞섰던 것 같아요. 정말 많은 배우들이 이 역할을 원했고 오디션을 봤다고 들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선택된 거잖아요. 고마운 만큼 정말 잘해야한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일남일녀 집안의 막내라는 여회현은 한 살 터울에게 무뚝뚝한 동생이라고 털어놨다. 그렇기에 극 중 누나를 연기한 박선영·한지혜, 쌍둥이 역의 금새록과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새롭고 좋았다고. 여기에 아버지 박효섭 역의 유동근까지 함께 촬영하는 날이면 현장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유동근 선생님이 웃음과 장난기가 많으세요. (한)지혜 누나도 마찬가지고요. 나중에는 서로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지는 거예요. 한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어서 NG가 많이 났습니다”
(사진=엘리펀엔터테인먼트)
무엇보다 “선생님과 선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 큰 공부가 됐다”며 대선배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그 중에서도 유동근을 예로 들며 “진짜 아버지처럼 우리를 아껴주셨다.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다”고 했다. “유독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해보라’는 식으로 방법을 제시해주셨다”며 “정답을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됐다”는 것. 이어 “인생에 대한 조언도 많이 들었다”면서 ‘배우로 계속 살 거라면 조급해 하지 말아라. 언젠가 너희의 시대가 올 거고 그 때를 위한 기회가 올 테니까 잘 받아먹으라’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또래 배우들과의 호흡도 너무 좋았죠. 실제로 많이 친해졌어요. 베스트 프렌드가 됐습니다. 덕분에 어려움 하나 없이 웃고 떠들면서 재밌게 연기했어요. 극 초반에 앙숙 관계로 그려진 김권 형과도 정말 친하고요. 연기할 때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세완이와의 실제 모습은 전혀 알콩달콩하지 않았어요. 말 그대로 친구 사이죠. 서로 질색하는 사이랄까요(웃음) 편하게 지낸 덕분에 우리의 로맨스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예쁘게 보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극 중 쌍둥이 동생을 연기한 새록 누나는 실제로 나보다 연상이에요. 누나 성격이 워낙 털털하고 착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나중에는 현실에서도 내가 오빠인 것처럼 말이 나올 때가 있었어요. 하하”
50부작의 긴 호흡을 유지하다 보니 힘든 적도 있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힘든 건 당연하고, 대본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해야 하니까 스트레스받을 때도 많았다”면서도 “배우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한다”며 의젓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올 여름을 강타한 폭염은 견디기 힘들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같이 살래요’에 출연하기 전과 후의 차이점은 ‘성숙함’이에요. 그 전에는 애기 같은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작품 하면서 성숙해진 것 같아요. 비단 연기뿐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로서의 자세라든가 마음가짐, 행동들까지요”
연기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성장과 성숙을 이뤄냈다는 여회현은 ‘같이 살래요’를 무사히 마친 자신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칭찬도 해주고 싶지만 누가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겠냐”며 “나 역시 부족하다고 느낀 게 많지만 이제 보완하면 된다. 멘탈 흔들리지 말고, 일단은 당분간 쉴 수 있을 때 푹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에 평소 정신력이 강한 편이냐고 묻자 “‘강철멘탈’은 아니다”라는 솔직한 답이 돌아왔다.
“쉽게 지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에요. 가끔 밤에 슬픈 노래를 듣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웃음)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대부분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잖아요. 그것도 맞는 말인데 좋아하는 일을 해서 해결될 우울험이 있는 반면, 그 누가 위로해줘도 풀리지 않는 우울함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는 최대한 나 혼자 시간을 보냅니다. 영화를 본다든지 하면서 시간을 흘려 보내요. 그렇게 지나고 보면 ‘왜 그것 때문에 힘들어했지?’라는 생각이 들죠”
여회현은 주위에 ‘힘들다’는 말은 하지만 왜 힘든지는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란다. 상대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지인들이나 가족이나 마찬가지라는 소속사 대표, 부모님이란다. 그 중에서도 부모님에 대해서는 “인생은 기승전가족”이라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여회현에 따르면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힘들어서 사라지고 싶다’고 하면 ‘그만 둬. 하지 마. 그게 뭐라고. 네가 힘들면 잠수 타’라며 다소 냉정하게 반응한다. 여회현은 그때마다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든다”며 “내가 지금 집에서 투정 부릴 때가 아니구나 한다”고 웃음 지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죠. ‘이번 작품 끝나면 또 뭐 하지?’ ‘배우로 성공할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을 해요. 연기자는 정규직이 아니잖아요. 이런 불안감이 연기를 잘해야한다는 압박과 부담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또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심리도 있어요. 나를 향한 기대는 갈수록 커지는데 나는 그대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스트레스를 받고… 이런 게 반복되는 것 같아요”
본인은 이렇게 말했지만 여회현의 데뷔부터 지금까지 필모그래피를 짚어보면 기반이 탄탄하다. 예술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인기 드라마의 단역으로 데뷔해 TV·스크린·무대를 가리지 않으며 연기했다. 그러는 동안 작품 속에서 맡는 캐릭터의 비중이 점점 커지더니 차세대 주연배우로 어엿하게 자리매김했다. 배우로서 이보다 더 완벽한 ‘엘리트 코스’가 또 있을까.
“나는 한번에 잘된 경우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도가 더디지도 않아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져도 된다고 생각하긴 해요. 그래도 스트레스는 받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고뇌하면서 성장하는 거죠”
남부러울 것 없는 과정을 밟고 있는 여회현이다. 그런데 그가 연기에 발을 들인 계기는 ‘친구따라 강남 간’ 경우다. 친구의 제안으로 연기학원에 다니다 재미를 붙여 본격적인 진로로 택하게 됐다. 우연히 시작한 배우가 지금은 천직처럼 느껴지는지 궁금했다. 이를 묻자 여회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인터뷰하기 전에 시간이 잠깐 비어서 근처를 걸어다녔어요. 저쪽에 극장이 보이더라고요. 불현듯 저기서 아르바이트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이래요. 지나가다 식당을 보면 ‘요리사를 해보면 어떨까?’ 싶고, 때로는 ‘월급 받으면서 내 능력껏 승진하고 규칙적인 삶을 사는 것도 행복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나는 자신있는 게 연기밖에 없어요. 재미도 있고요. 연기 아니면 못할 것 같아요”
(사진=엘리펀엔터테인먼트)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보였다. 여회현의 나이는 올해 스물다섯, 20대의 한 가운데에 서 있기 때문일까. 답은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은 편”이었단다.
“20대 초반부터 앞으로의 20년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까 고민했어요. 20대와 30대가 인생에서 뭐든 할 수 있는 시기라고 하잖아요. 이 생각으로 6년을 살아와서 지금은 딱히 큰 생각이 없고요(웃음) 그래서 스무살부터 스물한 살까지는 엄청 놀았어요, 노는 동안 술도 진탕 마셔보고 게임도 원 없이 해보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연애도 해봤죠. 데뷔하고부터는 악착같이 일했어요. 후회없이 놀고 일하고, 이 정도면 훌륭한 삶 아닐까요?”
여회현은 20대의 남은 절반도 쉼없이 일할 계획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작품을 선택하기보다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이므로 작품 사이 공백기는 불가피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좋은 거다. 대한민국 어느 직업이 한두 달씩 휴가를 즐길 수 있겠냐”며 활짝 웃었다. 긍정적인 마인드가 돋보인다 싶었는데 최종적인 꿈도 ‘행복한 배우’란다.
“누가 좌우명을 묻길래 ‘좌우명은 모르겠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었어요. 좀 철학적이고 진지한 이야기인데요. 사람이 밥 먹고 잠 자고 일 하고 돈 버는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을 추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는 행복이 배제된 것 같아요. 부수적인 걸 좇다가 정작 행복을 포기하는 거예요. 혹은 그게 행복인 줄 착각하고 살거나요. 물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서 가치관만이라도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요. 배우로서는 이 일을 즐기면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고요”
그런 그가 인터뷰 중 가장 행복해보인 순간은 영화에 관해 이야기한 때였다. 본인의 인생영화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너무 많다”더니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1995)이나 ‘다크나이트’(2008) ‘덩케르크’(2017)를 비롯한 크리스포터 놀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줄줄 읊었다. 국내에서는 봉준호 감독을 ‘거장’이라고 생각한다며 ‘복수는 나의 것’(2002)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설국열차’(2013) 등을 모두 챙겨봤고 작품마다 숨겨진 의미를 찾는 재미가 있다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주로 강렬한 장르물을 선호하는 듯 싶었다. 그 취향은 여회현이 희망하는 차기작에도 반영됐다.
“지금까지는 청년 캐릭터, 풋풋하거나 순박한 사랑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 번에는 진득하고 성숙한 남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길 수 있는 작품에 출연해보고 싶어요. OCN ‘나쁜 녀석들’ ‘보이스’ 시리즈처럼 거친 느낌의 장르물이요”
(사진=엘리펀엔터테인먼트)
다시, 여기서 ‘기억’ 속의 승호가 떠올랐다. 승호를 통해 보여준 여회현의 음울한 분위기나 메마른 표정들. 그가 바란대로 묵직한 장르물에 출연하다면 더욱 빛을 발하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이러한 믿음은 여회현이 꿈꾸는 행복의 기준이기도 하다.
“40대의 내 모습이요? 한 집안의 가장이 됐을 수도 있고요.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좋은 배우가 돼 있었으면 좋겠어요. 대중이 ‘여회현 나오는 작품은 무조건 봐야지’라고 말하는 배우, 후배들에게는 롤 모델로 꼽는 배우요. 나는 그 안에서 또 다른 행복을 찾고요.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 내 사람들과 소박하게, 초심 잃지 않으며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