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JTBC 제공)
[뷰어스=이소희 기자]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며 버틴다는 건 대체 어느 정도의 고통일까? 오히려 고통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이미 본인은 산산조각이 난 상태인지도 모른다. 감히 예측하기도 힘든 삶이기에 이를 눈에 보이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 역시 드물다. ‘눈이 부시게’에서 처절한 삶과 함께 제목 그대로 눈부신 성장을 보여준 남주혁은 그래서 더 대단하다.
남주혁은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기자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할 정도로 능력이 있지만 갖은 시련을 겪으며 자신을 저버리는 이준하를 연기했다. 이준하는 전망 좋던 기자라는 직업을 버리고 대신 노인에게 사기나 치는 홍보관에 들어간다. 돈만 밝히는 포악한 부친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그로 인해 버팀목이었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또 처음으로 만난 희망 혜자(김혜자, 한지민)마저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반강제적으로 삶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갔다.
혜자에게 ‘기자가 되려면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을 정도의 노력을 해야 한다’면서 따끔한 조언을 해줄 정도로 강직했던 이준하의 눈동자가 흐리멍덩해진 것도 이때부터다. 이준하는 할머니가 된 혜자가 자신이 아는 혜자인 줄도 모르고 자꾸만 자신에게 간섭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게 살아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이세요? 이게 사는 거냐고요!”
이준하는 죽었다. 사람에게 목숨만 붙어 있다고 해서 마냥 살아 있다고 해석할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구보다 찬란한 순간을 내던지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남자’라는 드라마의 설명처럼 이준하는 살아있지만 청춘을 내던지며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고 있다.
(사진=JTBC 제공)
남주혁은 이런 이준하와 하나가 됐다. 그가 보여주는 건조한 눈빛, 본인도 미치겠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짓, 세상 짐이란 모든 짐은 다 얹은 듯 축 처진 어깨는 이준하의 삶이 마치 본인의 것인 듯한 무게감을 보여준다. 이를 담아낸 남주혁의 모습은 이전에 불거진 연기 논란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보통의 배우라면 캐릭터를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 묘사해야 한다. 하지만 남주혁의 경우는 달랐다. 숨을 거둔 건 아니지만 죽어 있는, 씁쓸하고도 절망적인 영혼을 담아내야 했다. 그래서 남주혁은 이 어려운 배역을 함부로 연기한다기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질 중 몇 개를 조심스레 꺼내 ‘이준하’라는 인물에 적용한 듯하다.
돌이켜 보면 남주혁은 ‘눈이 부시게’ 제작발표회에서 몇 마디 하지 않았다. 2인 1역을 연기한 배우 김혜자와 한지민에게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갔다. 남주혁의 배역은 보다 베일에 싸여 있었다. 당시 그가 한 말 중 역할과 관련한 것이라고는 “준하가 나와 닮은 점이 많더라.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기만의 사연이 있는 모습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을 연기하며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좀 더 자연스러운 매력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는 말 정도였다.
하지만 ‘눈이 부시게’가 종영을 한 회 앞둔 지금, 이 말을 생각해 보니 남주혁의 말은 그 자체로 전부였다. 남주혁은 낯을 가리는 성격에 조금은 서먹한 행동, 거리를 두는 예의범절 등 본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온도를 이준하에 녹여냈다. 예전과 같은 작품이었다면 어색하다고 다가올 법한 행동들이 ‘눈이 부시게’에서는 이준하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한지민 역시 “남주혁은 또래보다 속 깊은 사람이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정서적으로 준하와 닮은 부분이 많더라. 속안에 있는 진중하고 차분한 면이 있어서 준하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던 것 같다”고 그의 역할에 대해 부연했다.
앞서 방영한 드라마 중 tvN ‘나의 아저씨’가 떠오른다. 여기에서 배우 이지은(아이유) 역시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이지안을 연기했다. 물론 이준하와 이지안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정도 등은 다르다. 하지만 이지은이 우울하고 진득한 자신의 내면을 끌어올려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이지안을 만들어낸 것처럼, 남주혁 또한 이준하 그 자체여서 빛났다. ‘인생 캐릭터’ ‘찰떡’과 같은 말로 그의 연기를 수식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이준하의 진정성과 감정의 결을 곱씹으며 남주혁이라는 배우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