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눈길에 ‘꽈당’하고 넘어지는 사람을 보면 아픔의 전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발생한다. 이렇듯 상대의 아픔이 때론 나의 즐거움이 되기도 하는 현상을 두고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라고 한다.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좋아하고 즐거움을 얻는 심리를 일컫는 말이다.
최근 국내 방송가에 ‘길티 플레져’를 이용한 예능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축구스타 안정환을 억지로 조기축구회 감독에 앉혀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히는 JTBC ‘뭉쳐야 찬다’, 게스트에게 무례한 행동을 일삼으며 인터뷰를 진행하는 tvND ‘괴릴라 데이트’, 최근 종영했으나 지나치게 잔혹한 장면으로 법정제재까지 받아가면서까지 패널들을 놀래킨 ‘대탈출2’가 그 예다. 자연스러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을 통해 웃음을 주는 이 예능프로그램들은 방송될 때마다 시청자들의 마음을 뺏고 있다.
사진제공=JTBC
◇ “감독인가 호구인가” 본격 안정환 괴롭히기 대작전
‘뭉쳐야 찬다’는 여행을 테마로 한 JTBC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뜬다’에서 파생된 작품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김용만과 정형돈, 김성주, 안정환은 방송 중 “조기 축구회를 만들어보자”는 말을 시시때때로 해왔다. 농담으로만 여겨질 이 발언이 매서운 제작진으로 인해 실제로 구현된 것이 ‘뭉쳐야 찬다’다. 국민들을 웃기고 울린 스포츠 레전드들을 한데 모아 안정환을 중심으로 조기 축구회를 만들어보자는 보기 좋은 모양새를 갖췄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저 안정환을 괴롭히기 위한 프로그램일 뿐이다. 레전드들의 막무가내 행동으로 어쩔 줄 모르는 근심 가득한 안정환의 얼굴이 폭탄 같은 재미를 안긴다.
서열 중심 문화가 몸에 배어 있는 스포츠 선수들을 모았는데, 대부분이 감독보다 나이가 많다. 1976년생 43세 안정환은 감독으로서 11살이나 많은 허재를 가르쳐야 한다. 최고 형님은 56세 이만기다. 이러다보니 선수들을 지도해야 하는 감독이 회식 때 일어서서 고기를 굽는 진풍경이 발생한다.
안정환을 답답하게 하는 건 선수들의 실력에 있다. 스포츠 스타로서 정점을 찍은 스타들이지만 세월도 많이 흘렀을 뿐 아니라 축구 상식과 재능이 크게 뒤떨어진다. 열심히만 뛰고 실속은 하나도 챙기지 못하는 심권호, 뛰는 것부터 어설픈 진종오와 김동현은 물론 허벅지 부상 때문에 걷는 것조차 어려운 허재에 신발만 신고 지쳐버린 양준혁까지 안 감독의 근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마라톤을 축구에 접목한 이봉주와 안정적인 볼 감각을 지닌 이만기, 공격진에서 찬스를 만들기도 하는 여홍철만이 팀원으로서 겨우 제 몫을 할 뿐이다.
축구에서만큼은 자존심을 걸고 임한다는 안정환은 심히 짜증스러운 표정과 침묵만 일관하고, 때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 방송에 참여한 것을 깊게 후회하고 있음을 온 몸으로 전한다. 오합지졸 축구팀과 안정환의 표정이 교차되는 장면은 시청자들에겐 참을 수 없는 웃음 포인트다.
“모든 선수들이 에이스가 될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밝힌 안정환이 ‘축알못’(축구를 알지도 못하는) 멤버들을 어떻게 지도해나갈지, 그 안에서 멤버들은 어떤 성장을 이뤄낼지, 또 안정환은 말 안듣는 멤버들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을지 등 많은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뭉쳐야 찬다’ 성치경 CP는 안정환을 일부러 괴롭히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냉장고를 부탁해’, ‘뭉쳐야 뜬다’를 같이 촬영하면서 안정환이라는 사람을 알았다. 축구를 비롯해 삶의 태도에 있어서 자기만의 틀이 있고, 예절바르며 타인에게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선을 깨기 위해 생각한 것이 조기축구”라며 “조기 축구회 같은 경우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 엄청난 스포츠스타였지만 축구는 못하는 사람들을 찾다가 이렇게 섭외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런 선수들을 지도한다는 게 어려운 미션이고, 안정환은 자신의 틀을 깨야만 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다. ‘안정환 괴롭히는 예능’이라고 많이 하는데 자연스럽게 파생된 고통이기 때문에 많이 좋아하시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제공=tvND
◇ “코인노래방에서 도우미를 요청했다는 루머가…” 국내 최초 게스트 푸대접 방송
tvN ‘코미디 빅리그’에서 뛰어난 연기력으로 공개 코미디계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이용진과 이진호가 전무후무한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과 만난다. KBS2 ‘연예가중계’의 코너 ‘게릴라 데이트’를 패러디한 ‘괴릴라 데이트’가 그것이다.
‘괴릴라 데이트’는 두 명의 MC 체제로 게스트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는 일반적인 토크쇼 형태의 방송이나 여타 방송과 궤를 달리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2MC의 질문이다. 게스트를 초청하면 일반적으로 칭찬 위주의 ‘립서비스’를 하기 마련인데, ‘괴릴라 데이트’에는 일절 그런 표현이 없다. 오히려 친구끼리도 하기 힘든 곤란한 질문만 무차별적으로 던진다.
매드클라운에게는 “발에 각질인가요?”라고 물어보고, 스윙스에게는 등장과 동시에 젖꼭지를 만지는가 하면 “래퍼 스윙칩”이라 소개하기도 했다. 이 정도는 약한 수위에 속한다. BJ감스트에게는 “코인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요청했다는 루머가 있어요”라고 현실 불가능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으며, 친분이 깊은 황제성에게는 “유부남에다 탈모를 가진 사람이라 좋아할 이유가 없다”, “공용 컴퓨터 위에 있는 황제성 씨 곽 티슈는 왜 이렇게 빨리 없어지는 거냐” 등의 질문으로 시종일관 무례했다. 황제성은 방송 초부터 제작진과 두 MC에게 욕설을 날렸다. 혹자에게는 불쾌감을 느낄만한 질문들이지만 이용진과 이진호는 능청맞게 불쾌감을 제거하며 웃음을 만들어낸다.
후반부 감동을 뽑아내겠다며 “그동안 방송활동 하면서 많이 힘드셨죠”라는 질문을 통해 진심을 유도한 뒤 게스트가 진심을 다해 속에 있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으면 만두나 김밥 등을 자기들끼리만 먹어댄다. 이런 콘셉트는 이전 방송에서는 없었던 장면이라 신선함을 준다. 진심을 털어놓고 있는데 먹는 것에만 집중하는 이용진과 이진호를 바라보는 게스트들의 황당한 표정 또한 웃음 포인트다.
시즌2에 돌입한 ‘괴릴라 데이트’는 ‘길티 플레져’를 이용하는 진짜 리얼리티 예능으로 500만 누적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황제성이나 유병재, 스윙스 등 이름값 높은 스타들이 계속해서 출연하고 있는 가운데 어떤 무례한 질문들로 게스트들을 당황하게 할지 기대감이 생긴다.
‘괴릴라 데이트’를 연출하는 류혜주 PD는 “토크쇼하면 늘 게스트들을 대접하여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구성이나 푸대접이라는 콘셉트가 게스트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장치로 활용되면서 이 프로그램만의 색깔이 완성된 것 같다”며 “촬영 초반에는 푸대접을 불편해하는 게스트도 있었으나, 2MC이 재기발랄함 덕에 불쾌해하는 게스트는 아직까진 없었다”고 말했다.
사진제공=tvN
◇ 예능의 혁신 ‘대탈출2’…“스릴감 체험이 핵심”
최근 종영한 tvN ‘대탈출2’는 혁신적인 예능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다. 완벽히 제작한 세트 안에서 탄탄하게 구성된 스토리, 그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패널들의 진실한 플레이가 조화를 이뤘다는 평이다. ‘더지니어스’ 시리즈와 ‘소사이어티’ 시리즈를 연출하며 머리 쓰는 예능의 선두주자가 된 정종연 PD의 작품이다.
연쇄살인 등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나 나올 법한 사연을 스토리로 녹여내며 긴장감을 불어넣은 대목과 더불어 등장인물들의 훌륭한 연기,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며 힌트들을 얻어내고 스토리를 전진해나가는 부분은 마치 현실 RPG 게임을 하는 느낌도 준다.
이 과정에서 강호동, 김종민, 김동현 등을 놀라는 장면들은 큰 웃음을 준다. 특히 UFC 격투기 선수지만 놀라는 것만큼은 여느 연예인보다 리액션이 훨씬 더 좋은 김동현은 ‘대탈출2’가 발굴한 스타다.
힘겨운 스토리를 풀어나간 패널들이 마주한 결말은 매회 예상을 뒤엎어버리며 충격을 줬다. 제작진이 엄청난 고민 끝에 촘촘하고 탄탄하게 짜놓은 각본에서 진짜로 좌충우돌 하는 패널들의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대탈출2’를 연출한 정종연 PD는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모험이라고 밝히면서 패널들에게 스릴 넘치는 체험을 느끼게 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정 PD는 “놀이공원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를 탈 때의 스릴감이 짜릿함을 준다. 일부러 패널들을 괴롭힌다기 보다는 무서운 놀이기구를 탈 때의 스릴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모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스릴감이 ‘대탈출2’를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