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라면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습니다. 아직 10월까지의 수출액만 집계된 만큼 남은 두달을 더하면 연간 수출액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해외 공장에서 생산·판매되는 분량까지 더하면 해외 한국 라면 판매액은 2조원을 웃돌 것으로 전망되는데요. ‘K-라면’은 이제 세계인 입맛을 사로잡는 수출 효자상품으로 우뚝 섰습니다. 특히 올해는 국내에 인스턴트 라면이 출시된지 60주년을 맞는 해라 한층 의미가 깊은데요. 한국 라면이 걸어온 발자취를 함께 되짚어 봤습니다.
◆배고픈 시절 ‘따뜻한 한 끼’를 위해
초창기 삼양식품 월곡공장의 모습. 사진=삼양식품
국내 최초의 라면은 삼양식품에서 개발한 삼양라면이었습니다. 삼양식품의 창업자인 고 전중윤 명예회장은 60년대 초 먹을 것이 없어 미군이 버린 음식을 끓여 끼니를 때우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라면의 국내 도입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전후 제반 기술이라 할 것이 없던 상황이었던 만큼 일본에서 기계와 기술을 들여와 제품 개발에 나섰고, 1963년 삼양라면이 탄생했습니다.
모두가 배고팠던 시기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따뜻한 한끼 식사를 할 수 있는 라면은 금세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른바 ‘꿀꿀이죽’이 5원, 담배는 25원, 커피도 35원하던 시기에 한봉지 10원이라는 가격으로 부담을 최대한 낮춘데다 정부 차원의 혼분식 장려 정책까지 더해지면서 라면은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죠. 출시 4년째인 1966년 240만봉지이던 삼양라면 판매량은 1969년엔 1500만 봉지로 급증했고, 이에 힘입어 삼양식품도 종합식품업체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삼양식품 성공을 따라 후발주자들도 나타났습니다. 가장 빨랐던 것은 1965년 롯데공업주식회사에서 선보인 롯데라면이었습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이 회사가 바로 현재 라면 1위를 굳건히 지키는 농심의 전신입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라면이 쏟아져 나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롯데라면만이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당시 삼양식품이 라면 시장에서 80%가 넘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유지했기 때문이죠.
1975년 롯데공업주식회사는 농심라면을 선보입니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마음을 받들어 더욱 품질 좋은 식품을 생산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죠. 농심라면은 친근한 광고와 함께 히트제품으로 등극했고 1년만에 라면 생산 실적을 두배로 끌어 올렸습니다. 이에 롯데공업주식회사도 사명을 농심으로 전격 변경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농심은 이렇게 탄생하게 됐습니다.
◆라면의 황금세대, 우후죽순 등장한 스테디셀러
1984년 출시된 팔도비빔면. 사진=hy
경제성장의 성과가 가시화되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라면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변화의 중심에 선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만년 2위였던 농심이었습니다. 농심은 1982년 너구리, 1983년 안성탕면, 1984년 짜파게티를 잇달아 선보이며 라면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켰습니다. 출시와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농심의 장수 제품으로 자리 잡았죠. 농심이 신제품을 연이어 성공하면서 삼양식품의 굳건했던 철옹성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985년에는 농심이 점유율 40.4%로 39.6인 삼양식품을 제치고 라면 시장 1위를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창사 20년만의 성과였죠.
농심은 라면 시장 1위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제품 개발에 나섰고, 1986년 라면의 대명사와도 같은 ‘신라면’을 출시합니다. 신라면은 순한맛 위주였던 라면 시장에 본격적인 매운맛 라면시대를 열었습니다. 라면이 매운 음식이라는 이미지도 신라면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죠. 1991년 라면시장 매출액 순위 1위에 오른 신라면은 현재까지 무려 33년동안 시장 1위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농심 외에도 다양한 스테디셀러 제품이 쏟아진 ‘라면의 황금세대’였습니다. 1983년 ‘팔도라면’을 선보이며 시장에 진입한 팔도는 이듬해인 1984년 ‘팔도비빔면’을 출시합니다. 비빔국수에서 착안해 ‘차갑게 먹는 라면’이라는 카테고리를 개척하면서 지금까지도 비빔면의 대표주자로 자리잡았죠. 1987년 청보식품을 인수하며 라면 시장에 뛰어든 오뚜기도 1988년 ‘진라면’을 출시했습니다. 당시 출시된 ‘순한맛’과 ‘매운맛’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장수 제품입니다.
◆우지파동으로 촉발된 침체기…‘식품 안전’에서 프리미엄화까지
신라면 블랙 제품 이미지. 사진=농심
하지만 순조롭게 성장세를 이어가던 라면업계는 1980년대 말 거대한 악재를 마주합니다. 1989년 검찰이 공업용 쇠기름을 식품 원료로 사용했다며 삼양식품 등 5개사 대표와 임직원을 구속하면서 촉발된 이른바 ‘우지파동’ 때문입니다. ‘공업용’이라는 단어에서 유해성 논란이 촉발되자 이를 라면을 튀기는데 사용하던 삼양식품 등 라면 업체들은 직격탄을 맞습니다.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은 ‘수입한 우지로 만들어진 라면 등 최종 완제품은 현행 식품위생법 규격기준에 적합하다’는 반론을 펼쳤지만, 검찰은 기소 방침을 유지했죠.
1997년 대법원에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며 원심인 서울고등법원 판결 그대로 무죄를 확정, 논란은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라면업계는 40%에 달하는 매출 타격을 겪은 뒤였습니다. 특히 논란의 중심이었던 삼양식품은 4000여명 임직원 중 4분의1 가량이 이직하고 100억원 상당 제품을 수거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지파동으로 국내 식품 제조 업체들은 동물성 기름 대신 팜유 등 식물성 기름을 주로 사용하게 됩니다. 동물성 기름이 몸에 해롭다는 인식이 아직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우지파동의 여파는 컸습니다.
우지파동은 라면 업계 전반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 소비자의 식품 안전에 대한 높은 관심을 확인한 라면 업계는 제품 연구개발에 더욱 몰두하게 됐습니다. 안전하고 균일한 품질의 제품 생산을 위한 노력은 국민소득성장과 함께 프리미엄 라면에 대한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2011년 출시된 농심의 신라면 블랙입니다. 라면에 프리미엄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가격을 올리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다소 비싼 가격이더라도 한층 고급화된 라면을 원하는 수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이후 라면 업계에서는 이후 농심의 ‘짜왕’이나 오뚜기의 ‘진짬뽕’ 등 다양한 맛과 콘셉트 제품을 출시합니다.
◆해외에서도 통하는 ‘K-라면’, 음식 넘어 한국 문화 알리미로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신라면을 구입해 들고있는 관광객들. 사진=농심
라면의 다양화와 고급화는 이제 국내 소비자는 물론 해외 소비자까지 사로잡기에 이르렀습니다. 라면의 수출 성과가 두드러진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사실 삼양식품과 농심을 필두로 한 라면업체는 이전부터 해외 시장의 문을 꾸준히 두드려 왔습니다. 삼양식품은 1969년 베트남에 150만불의 라면을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등 60여개 국가에 라면을 수출하며 일찌감치 라면의 세계화에 나섰습니다. 농심 역시 1971년 미국 LA지역에 라면을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90년대 중국과 일본, 미국 등지에 판매법인과 생산공장을 설립하며 해외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했죠.
특히 2012년 삼양식품이 선보인 불닭볶음면은 국내는 물론 해외 시장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뚜기에 라면 시장 2위를 빼앗기며 시장 입지가 약화하던 삼양식품은 불닭볶음면 인기를 바탕으로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국내 매출보다 해외 매출이 월등히 앞서며 수출 중심 기업으로 탈바꿈했죠.
업계에서는 삼양식품을 ‘불닭’ 브랜드 출시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꾸준히 해외 투자를 늘리던 농심도 팬데믹을 전후로 집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간편식 수요가 늘어나면서 매출이 급성장했습니다. 특히 영화 기생충에 소개된 ‘짜파구리’가 인기를 끌면서 예상 밖의 매출 효과를 거두기도 했죠.
이제 라면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한국 문화를 알리는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삼양식품의 ‘불닭’은 해외에서 ‘불닭 챌린지’라는 독특한 놀이 문화를 형성하면서 K-팝 등 한국문화와 결합해 글로벌 브랜드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농심의 신라면 역시 일본, 중국에서부터 중동 및 아프리카,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에서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 등에 이르기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죠. 오뚜기 등 다른 업체들도 하나둘 해외로 눈을 돌리는 만큼 ‘K-라면’이 앞으로 얼마나 뻗어 나갈 수 있을지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