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1966년 한국비료 헌납발표 당시의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1950년대 후반 시중은행을 직접 소유하며 승승장구하던 삼성은 5.16 군사쿠데타 발발로 은행 지분 몰수, 한국비료 헌납 등 수난을 겪는다.(자료=연합뉴스) 1회에서는 故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생명이라는 동아줄을 잡고 삼성자동차라는 늪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살펴봤다. 지분 40%를 내놓고도 삼성그룹의 삼성생명 지배력은 지금도 여전히 공고하다. 재벌의 금융계열사 활용법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삼성생명은 이건희 회장이 직접 일군 기업이 아니다. 선대 이병철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다. 삼성그룹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중 누가 더 금융을 잘 활용했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이병철 회장의 손을 들어준다. ■ 26세에 200만평 대지주..."식산은행이 내 금고"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에 따르면 일본 와세다대 중퇴 이후 귀국해 방황하던 청년 이병철은 26세 되던 1936년 마음을 다잡고 경남 마산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정미소 수입도 짭짤했지만 더 큰 수입은 부동산 투자에서 나왔다. 일제가 설립한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저리에 돈을 빌려 김해의 논밭을 매입, 고가에 되파는 방법으로 1년 만에 200만평 대지주가 됐다. 스스로 “이렇게 손쉬운 돈벌이는 흔하지 않을 것”이라며 “식산은행의 금고가 마치 나의 금고로 착각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식산은행의 갑작스런 대출금 상환 요구로 종국에는 빈털터리가 됐지만 ‘은행을 활용한 돈벌이’라는 강렬한 경험이 청년 이병철의 뇌리에 강하게 박히기엔 충분했다. 이후 대구와 서울에서 삼성상회,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잇따라 설립하며 재기에 나설 때도 ‘거액의 은행융자’는 큰 역할을 했다. 이병철 회장을 인터뷰한 백인호 전 매일경제 기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1947년 대구에서 서울로 주거지를 옮기면서 혜화동에 무리해서 큰 저택을 마련했는데 ‘집이 너무 큰 것 아니냐’는 친구들의 말에 “은행에서 융자해 줄 때 집이 얼마나 큰가를 보고 대출해 준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회장이 사업을 하면서 은행융자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다. 몰아치듯 사업을 확장하던 이병철은 1957년 은행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소유할 수 있는 천금의 기회를 맞았다. 이승만 정부가 사채나 귀금속에 쏠린 자금을 흡수하기 위해 조흥, 상업, 저축, 흥업, 제일 등 시중은행 주식의 민간 불하를 결정한 것이다. 이병철의 삼성은 흥업은행(현 우리은행) 주식 83%와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주식 55%를 확보했다. 당시 은행들은 상호출자를 통해 지분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삼성은 2개 시중은행의 최대주주 지위를 차지하고도 실제로는 4대 시중은행까지 지배하는 효과를 누렸다. 손아귀에 들어온 은행은 삼성에 신세계를 열어줬다. ■ 1957년 은행 소유 천금의 기회..."신세계 열리다" 이병철은 천일증권, 한국타이어,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삼척시멘트(현 동양시멘트), 호남비료, 동일방직, 효성물산, 근영물산 등을 연달아 인수·설립했다. 은행을 지렛대 삼아 부실기업을 싸게 인수하거나 신규 법인을 설립해 몸집을 불린 것이다. 삼성은 은행 인수 3년도 채 되지 않아 16개 계열기업군을 거느리며 누구도 넘보기 힘든 재벌 그룹의 면모를 갖춘다.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가 현대건설을 10대 건설사로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1950년대 후반, 이병철 회장은 이미 독보적인 재계 1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다만, 20대 식산은행에서 겪었던 것처럼 삼성의 신세계가 오래 가진 못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부정축재자 처리 과정에서 불하된 은행들을 몰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60년대 이병철의 재계 1위 지위는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 당국(국가재건최고회의)의 발표에 따르면 이병철의 삼성은 이승만 정권에 정치자금 4억2500만환을 제공했고, 조세포탈액은 33억환에 달했다. 전후 경제활동이 미미했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규모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일협정을 원했고, 일본 인맥이 탄탄했던 이병철의 활용 가치는 높았다. 이병철은 박정희와 독대 뒤 구속을 면했다. 이후 공장 등을 건설해 정부에 주식을 납부하면 처벌을 면해 주는 ‘부정축재 환수절차법’에 기대 위기를 모면했다. 군사정권은 이병철에게 비료공장을 지어 헌납할 것을 요구했다. 이병철은 한국비료공업을 설립하는 한편,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정경유착 고리는 다시 단단해졌고, 거액의 정치자금은 대상을 바꿔 계속 정권으로 흘러 들어갔다. ‘은행의 추억’이 강렬했기 때문일까. 1960년 검찰 연행, 1961년 해외 도피 등 연속되는 위기를 겪고도 이병철은 1963년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을 전격 인수한다. 1957년 설립된 동방생명은 동화백화점, 동양화재를 인수하며 승승장구했으나 창업주 강의수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매물로 나왔다. 손해보험사만 갖고 있던 삼성으로선 생명보험사 소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계 1위에 올라선 경쟁력의 원천이 은행융자였는데 은행을 빼앗기자 보험사를 은행의 대안으로 삼은 것. 동방생명을 인수하면서 계열사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동양화재, 동남증권까지 함께 넘어왔다. 소매·유통업 진출은 덤이었다. 동화백화점은 훗날 신세계그룹으로 성장한다. ■ 삼성의 금융업 종착지는 '은행', 하지만... 생보사(삼성생명), 손보사(삼성화재) 인수로 삼성그룹이 금융업 영위에 만족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삼성그룹의 금융업 종착지는 늘 은행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호시탐탐 은행업 재진출을 노렸지만 박정희의 장기 집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1981년 정치적 격변기에 기회가 찾아왔다. 1980년 등장한 신군부는 외국자본 합작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1981년 9월 한미금융(한미은행)이 설립되고 국내에선 삼성그룹과 대우그룹, 해외에서는 미국의 BOA(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합작에 참여했다. 삼성그룹에서는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이 한미은행의 지분을 보유했는데, 외환위기에도 팔지 않고 버티다 2003년에 가서야 스탠다드차터드은행에 지분을 매각했다. 재벌에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되고 때가 무르익으면 은행을 다시 인수하겠다는 복안으로 지분을 보유했으나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삼성그룹과 우리금융과의 관계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이병철이 인수했던 흥업은행은 한일은행을 거쳐 우리은행의 한 축이 됐다. 우리은행의 다른 축인 상업은행 역시 1950년대 이병철이 지배했던 은행이다. 삼성전자의 주거래은행이 괜히 우리은행인 게 아니다. 1950년대부터 인연이 이어져 온, 삼성에서는 사실상 패밀리로 여기는 은행이 우리은행이다. 삼성그룹 비서실, 삼성전자 자금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실장, 한미은행 비상임이사, 삼성증권 대표 등을 역임한 황영기 씨가 2004년 우리금융으로 이직했을 때 업계 안팎에선 큰 술렁임이 있었다. 삼성그룹이 한미은행 지분을 매각한 직후 삼성그룹 ‘금융통’이 우리금융으로 둥지를 옮겼기 때문이다. 삼성의 은행업 진출에 황 회장이 막후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아니냐는 풍문도 돌았다. 금산분리 규제가 완화돼 삼성은행이 출범할 경우 초대 은행장 후보 영순위로 꼽힌 인물이 황영기였다. 물론 풍문은 풍문에 그쳤지만 말이다. 2007년 국정감사에서는 ‘삼성은행’이 다시 한 번 핫이슈로 부상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이 입수·공개한 ‘삼성금융계열사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로드맵’ 문건이 발단이었다. 2005년 5월 삼성전략기획실 직속 삼성금융연구소가 작성한 해당 문건에는 금산분리 정책에 대한 이론적 논리적 대응, 비은행 금융지주회사제도 도입, 비은행금융기관의 은행업 진출방안 등의 추진과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은산분리가 완화 또는 폐지되면 최상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어슈어뱅킹(보험사의 은행업 겸업)을 노려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2005년 ‘X-파일 사건’, 2007년 ‘비자금 사건’과 함께 이재용 불법 경영승계 논란 등을 거치며 삼성이 기대했던 ‘산업자본에 대한 우호적 여론’의 순간은 끝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재벌에 대한 국민 여론은 악화일로를 걸어 금산분리 정책은 계속 강화·보완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삼성그룹의 주거래은행은 우리은행이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부가 시중은행 주식의 민간 불하를 결정하면서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흥업은행(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의 최대주주가 됐는데 두 은행은 현 우리은행의 전신이다.(자료=우리은행)

[삼성과 금융②] ‘은행의 추억’...4대 시중은행이 내 손안에

최중혁 기자 승인 2024.11.14 06:00 의견 0

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1966년 한국비료 헌납발표 당시의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1950년대 후반 시중은행을 직접 소유하며 승승장구하던 삼성은 5.16 군사쿠데타 발발로 은행 지분 몰수, 한국비료 헌납 등 수난을 겪는다.(자료=연합뉴스)


1회에서는 故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생명이라는 동아줄을 잡고 삼성자동차라는 늪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살펴봤다. 지분 40%를 내놓고도 삼성그룹의 삼성생명 지배력은 지금도 여전히 공고하다. 재벌의 금융계열사 활용법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삼성생명은 이건희 회장이 직접 일군 기업이 아니다. 선대 이병철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다. 삼성그룹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중 누가 더 금융을 잘 활용했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이병철 회장의 손을 들어준다.

■ 26세에 200만평 대지주..."식산은행이 내 금고"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에 따르면 일본 와세다대 중퇴 이후 귀국해 방황하던 청년 이병철은 26세 되던 1936년 마음을 다잡고 경남 마산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정미소 수입도 짭짤했지만 더 큰 수입은 부동산 투자에서 나왔다. 일제가 설립한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저리에 돈을 빌려 김해의 논밭을 매입, 고가에 되파는 방법으로 1년 만에 200만평 대지주가 됐다. 스스로 “이렇게 손쉬운 돈벌이는 흔하지 않을 것”이라며 “식산은행의 금고가 마치 나의 금고로 착각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식산은행의 갑작스런 대출금 상환 요구로 종국에는 빈털터리가 됐지만 ‘은행을 활용한 돈벌이’라는 강렬한 경험이 청년 이병철의 뇌리에 강하게 박히기엔 충분했다.

이후 대구와 서울에서 삼성상회,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잇따라 설립하며 재기에 나설 때도 ‘거액의 은행융자’는 큰 역할을 했다. 이병철 회장을 인터뷰한 백인호 전 매일경제 기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1947년 대구에서 서울로 주거지를 옮기면서 혜화동에 무리해서 큰 저택을 마련했는데 ‘집이 너무 큰 것 아니냐’는 친구들의 말에 “은행에서 융자해 줄 때 집이 얼마나 큰가를 보고 대출해 준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회장이 사업을 하면서 은행융자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다.

몰아치듯 사업을 확장하던 이병철은 1957년 은행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소유할 수 있는 천금의 기회를 맞았다. 이승만 정부가 사채나 귀금속에 쏠린 자금을 흡수하기 위해 조흥, 상업, 저축, 흥업, 제일 등 시중은행 주식의 민간 불하를 결정한 것이다. 이병철의 삼성은 흥업은행(현 우리은행) 주식 83%와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주식 55%를 확보했다. 당시 은행들은 상호출자를 통해 지분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삼성은 2개 시중은행의 최대주주 지위를 차지하고도 실제로는 4대 시중은행까지 지배하는 효과를 누렸다. 손아귀에 들어온 은행은 삼성에 신세계를 열어줬다.

■ 1957년 은행 소유 천금의 기회..."신세계 열리다"

이병철은 천일증권, 한국타이어,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삼척시멘트(현 동양시멘트), 호남비료, 동일방직, 효성물산, 근영물산 등을 연달아 인수·설립했다. 은행을 지렛대 삼아 부실기업을 싸게 인수하거나 신규 법인을 설립해 몸집을 불린 것이다. 삼성은 은행 인수 3년도 채 되지 않아 16개 계열기업군을 거느리며 누구도 넘보기 힘든 재벌 그룹의 면모를 갖춘다.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가 현대건설을 10대 건설사로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1950년대 후반, 이병철 회장은 이미 독보적인 재계 1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다만, 20대 식산은행에서 겪었던 것처럼 삼성의 신세계가 오래 가진 못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부정축재자 처리 과정에서 불하된 은행들을 몰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60년대 이병철의 재계 1위 지위는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 당국(국가재건최고회의)의 발표에 따르면 이병철의 삼성은 이승만 정권에 정치자금 4억2500만환을 제공했고, 조세포탈액은 33억환에 달했다. 전후 경제활동이 미미했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규모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일협정을 원했고, 일본 인맥이 탄탄했던 이병철의 활용 가치는 높았다. 이병철은 박정희와 독대 뒤 구속을 면했다. 이후 공장 등을 건설해 정부에 주식을 납부하면 처벌을 면해 주는 ‘부정축재 환수절차법’에 기대 위기를 모면했다. 군사정권은 이병철에게 비료공장을 지어 헌납할 것을 요구했다. 이병철은 한국비료공업을 설립하는 한편,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정경유착 고리는 다시 단단해졌고, 거액의 정치자금은 대상을 바꿔 계속 정권으로 흘러 들어갔다.

‘은행의 추억’이 강렬했기 때문일까. 1960년 검찰 연행, 1961년 해외 도피 등 연속되는 위기를 겪고도 이병철은 1963년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을 전격 인수한다. 1957년 설립된 동방생명은 동화백화점, 동양화재를 인수하며 승승장구했으나 창업주 강의수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매물로 나왔다. 손해보험사만 갖고 있던 삼성으로선 생명보험사 소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계 1위에 올라선 경쟁력의 원천이 은행융자였는데 은행을 빼앗기자 보험사를 은행의 대안으로 삼은 것. 동방생명을 인수하면서 계열사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동양화재, 동남증권까지 함께 넘어왔다. 소매·유통업 진출은 덤이었다. 동화백화점은 훗날 신세계그룹으로 성장한다.

■ 삼성의 금융업 종착지는 '은행', 하지만...

생보사(삼성생명), 손보사(삼성화재) 인수로 삼성그룹이 금융업 영위에 만족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삼성그룹의 금융업 종착지는 늘 은행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호시탐탐 은행업 재진출을 노렸지만 박정희의 장기 집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1981년 정치적 격변기에 기회가 찾아왔다. 1980년 등장한 신군부는 외국자본 합작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1981년 9월 한미금융(한미은행)이 설립되고 국내에선 삼성그룹과 대우그룹, 해외에서는 미국의 BOA(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합작에 참여했다. 삼성그룹에서는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이 한미은행의 지분을 보유했는데, 외환위기에도 팔지 않고 버티다 2003년에 가서야 스탠다드차터드은행에 지분을 매각했다. 재벌에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되고 때가 무르익으면 은행을 다시 인수하겠다는 복안으로 지분을 보유했으나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삼성그룹과 우리금융과의 관계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이병철이 인수했던 흥업은행은 한일은행을 거쳐 우리은행의 한 축이 됐다. 우리은행의 다른 축인 상업은행 역시 1950년대 이병철이 지배했던 은행이다. 삼성전자의 주거래은행이 괜히 우리은행인 게 아니다. 1950년대부터 인연이 이어져 온, 삼성에서는 사실상 패밀리로 여기는 은행이 우리은행이다. 삼성그룹 비서실, 삼성전자 자금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실장, 한미은행 비상임이사, 삼성증권 대표 등을 역임한 황영기 씨가 2004년 우리금융으로 이직했을 때 업계 안팎에선 큰 술렁임이 있었다. 삼성그룹이 한미은행 지분을 매각한 직후 삼성그룹 ‘금융통’이 우리금융으로 둥지를 옮겼기 때문이다. 삼성의 은행업 진출에 황 회장이 막후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아니냐는 풍문도 돌았다. 금산분리 규제가 완화돼 삼성은행이 출범할 경우 초대 은행장 후보 영순위로 꼽힌 인물이 황영기였다. 물론 풍문은 풍문에 그쳤지만 말이다.

2007년 국정감사에서는 ‘삼성은행’이 다시 한 번 핫이슈로 부상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이 입수·공개한 ‘삼성금융계열사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로드맵’ 문건이 발단이었다. 2005년 5월 삼성전략기획실 직속 삼성금융연구소가 작성한 해당 문건에는 금산분리 정책에 대한 이론적 논리적 대응, 비은행 금융지주회사제도 도입, 비은행금융기관의 은행업 진출방안 등의 추진과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은산분리가 완화 또는 폐지되면 최상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어슈어뱅킹(보험사의 은행업 겸업)을 노려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2005년 ‘X-파일 사건’, 2007년 ‘비자금 사건’과 함께 이재용 불법 경영승계 논란 등을 거치며 삼성이 기대했던 ‘산업자본에 대한 우호적 여론’의 순간은 끝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재벌에 대한 국민 여론은 악화일로를 걸어 금산분리 정책은 계속 강화·보완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삼성그룹의 주거래은행은 우리은행이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부가 시중은행 주식의 민간 불하를 결정하면서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흥업은행(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의 최대주주가 됐는데 두 은행은 현 우리은행의 전신이다.(자료=우리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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