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1997년 5월 12일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을 방문해 시험차량에 시승한 故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2020/10/25(자료=연합뉴스) “나는 대통령이랑 형님 동생 하는 사이란 말이야. 어젯밤에도 대통령 안방에서 대통령 부부랑 우리 부부가 함께 식사를 했어.” “회장님께서 대통령을 만나 저녁을 드신 것이 저랑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래도 (자동차 사업) 허가를 안 해주겠나?”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봐도 승용차 생산이 포화 상태에 있는데 그런 사업을 해서 이익을 낼 수 있겠습니까?” “매년 5000억원씩 10년 동안 적자를 내도 괜찮다니깐.” 대통령과 식사를 한 회장님은 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다. 또 삼성에 자동차 사업 허가를 안 내주고 끝까지 버틴 이는 ‘경제민주화의 아이콘’ 김종인이다. 그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노태우 대통령을 보좌했다. 이 대화는 2020년 출간된 김종인의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처음 공개됐다. ‘삼성자동차의 탄생 비화’ 정도로 가볍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재벌의 금융 활용법을 살펴보려면 좀 더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10년 적자 자신감 뒤엔 삼성생명 있었다 지금이야 삼성그룹 자산에서 5000억원은 그리 큰 돈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대화가 오간 시점은 1991년. 당시 시간당 최저임금이 700원(현재 9860원), 강남 압구정 35평 아파트 가격이 3억~4억원(현재 35억~45억원)이다. 1991년의 5000억원은 현재 가치로 최소 5조원 이상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때문에 당시 대화를 2024년 버전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매년 5조원씩 10년 동안 50조원 적자를 내도 버틸 자신이 있으니 자동차사업 허가권을 달라.” 아무리 재벌이라지만 삼성 총수의 상식을 뛰어넘는 자신감은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답은 금융계열사 ‘삼성생명’에 있다. 삼성그룹의 ‘자동차 흑역사’에서 삼성생명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삼성생명이 없었다면 현재 삼성전자 성공 스토리는 전개 자체가 불가능했다. 자동차 사업 진출 초기에는 그룹의 자금줄로서 인수합병(M&A)의 첨병 역할을 했다. 김종인이 1992년 경제수석에서 물러나자 그 해 바로 삼성그룹에 자동차사업 승인이 떨어졌다. 승용차 부문은 진출하지 않고 상용차만 만들겠다는 약속이 먹혔다. 하지만 이는 허가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고 삼성은 1년도 안 돼 이를 번복한다. 그리고 4개월 뒤 삼성생명을 통해 은밀하게 기아자동차 지분 확보에 나선다. 당시 자동차 시장은 현대, 대우, 기아, 쌍용 등 이미 4개 회사가 경쟁 중이었다. 5번째로 진출하는 업체가 제로 베이스에서 사업을 시작할 경우 새로 공장을 짓고 인력을 뽑는 데만 최소 수 년이 걸린다. 적당한 가격에 M&A에 성공하면 돈과 시간 모두 아낄 수 있다. 게다가 기아와 쌍용은 만년 적자기업이었다. 그 중에서도 생산 및 수출 규모가 크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던 기아는 M&A의 훌륭한 타깃이었다. 이에 그룹은 삼성생명을 통해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아자동차에 담보대출을 진행하는 한편, 물밑으로는 주식 매입에 나선다. ■ "기아 부도는 삼성탓"...김선홍의 울분 하지만 삼성의 신수종사업 내부 보고서가 유출되고, 기아차 지분 매입 사실도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삼성의 동태를 수상히 여긴 기아차 측에서 내부 정보팀을 구성해 적극 대응에 나선 결과다. 인수하려던 기아차가 잇따른 폭로를 하자 삼성은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결국 M&A를 포기하고 독자 진출 쪽으로 방향을 튼다. 1994년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도입 계약을 맺고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인 부산에 승용차 공장을 짓는다. 그렇다고 삼성이 M&A 생각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후 기아차 소하리공장을 불법 촬영하다 들키는가 하면, 쌍용차 인수합병 추진이 시장에 알려지기도 했다. 삼성의 M&A 여부는 업계의 상시 핫이슈였다. 당시 기아차의 김선홍 회장은 본업인 자동차 사업보다 M&A 방어에 더 신경을 쓰다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실제로 기아차는 1997년 상반기 부도설에 시달리다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해 말 IMF 외환위기를 불러온 직접적 원인이라는 오명까지 덮어썼다. 1999년 1월 국회서 열린 ‘IMF 환란원인 규명과 경제위기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에서 김선홍 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기아 부도는 삼성 때문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5월부터 (삼성이 퍼뜨린 나쁜) 설에 의해 우리가 자금회수를 당한 것이 5500억원”이라며 “내 목이 떨어져도 (삼성 때문에 부도가 났다는 것은) 옳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삼성은 이를 부인했지만 ‘삼성 음모설’은 그로부터 6년 뒤인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회자되며 삼성그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건희 회장은 5000억원씩 10년 간 적자를 보는 것을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삼았지만 그 순간은 예상보다 일찍 왔다. 당초 1조3000억원 정도면 부산 공장이 완성될 것으로 계획했지만 실제로는 4조원 넘게 투입됐다. 1998년 3월 첫 양산 모델인 SM5가 출시됐는데 나라가 외환위기의 구렁텅이에 빠진 시점이었다.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실업자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자동차 판매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게다가 생산 단가가 너무 높아 자동차가 1대씩 팔릴 때마다 이익은커녕 150만원씩 손실이 났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삼성은 결국 내홍 끝에 1999년 6월 법정관리를 신청한다. 승용차 사업 허가 4년 6개월 만이었다. ■ 그룹 자금줄 '삼성생명' 통해 퇴로 확보 보통의 대기업이었다면 재기 불능이었겠지만 삼성은 달랐다. 그룹의 자금줄 삼성생명의 존재감이 또 한번 빛을 발한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이 소유한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내놓으며 퇴로를 확보했다. 당시 채권단이 보유한 삼성자동차 부채는 2조4500억원이었으므로 삼성생명 1주당 70만원의 가치가 매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대기업 총수는 경영권 박탈은 물론 구속까지 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이건희 회장은 삼성생명 지분을 지렛대로 악화된 민심을 돌리고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뒤 진행된 일은 그다지 깔끔하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1999년 8월 이건희 회장이 채권단과 작성한 합의서에는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2000년 12월 31일까지 처분해 지급한다’고 적시됐지만 삼성생명 상장이 불발되면서 약속 이행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채권 시효 소멸을 앞두고 결국 채권단은 2005년 12월 소송을 제기하고 삼성은 표정을 싹 바꿔 ‘합의서 무효’를 주장하며 맞섰다. 삼성생명 상장은 2010년에야 이루어지는데 공모가(110만원)가 70만원을 훌쩍 넘어서면서 비로소 합의서 이행의 단초가 마련됐다. 2000년 전후 상장했다면 20만원 가치도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회고한다. 안 갚고 버티면서 끝내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 낸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받았던 압력과 회유를 가슴에 새겼던 것일까. 김종인은 2006년 국회의원 시절 “삼성은 2조원을 웃도는 삼성자동차 부채를 왜 아직도 갚지 않느냐”며 이건희 회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재경위 표결에서 부결돼 이 회장이 국감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종인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한탄한다. “5000억씩 10년간 적자를 내도 된다는 말을 어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기업의 자산을 개인의 쌈짓돈 정도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배어있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생각이다.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재벌 기업이, 그렇게 자원을 소각하듯 하늘에 날려버려도 되는 것인가. (중략) 내가 경제수석 자리에서 물러나니 2개월만에 그 재벌의 자동차 사업은 승인이 떨어졌다. 역시 상용차뿐 아니라 승용차까지 생산하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상용차 부문이 먼저 날아갔고, 승용차도 문제가 생겨 결국 외국 기업에 넘어갔다. 그렇게 5조원 가량을 허공에 날렸다. 한 사람의 소원을 위해 5조원을 소각한 셈이다. 국가 경제의 합리성이란 개념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민사접수 창구에서 삼성생명 유배당 보험 계약자들과 소송대리인들이 상장을 준비중인 삼성생명이 상장전에 '유배당 계약자 이익배당금 10조원 지급하라'는 내용의 소송의 소장을 접수하고 있다. 상장 차익 분배 문제로 삼성생명의 상장이 늦춰지면서 삼성자동차 채권단은 10년 넘도록 약 5조원의 채권을 회수하지 못했다. 2010.2.22(자료=연합뉴스)

[삼성과 금융①] ‘10년 5조 적자’...이건희 호언장담 배경

최중혁 기자 승인 2024.11.12 06:00 | 최종 수정 2024.11.14 05:53 의견 0

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1997년 5월 12일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을 방문해 시험차량에 시승한 故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2020/10/25(자료=연합뉴스)

“나는 대통령이랑 형님 동생 하는 사이란 말이야. 어젯밤에도 대통령 안방에서 대통령 부부랑 우리 부부가 함께 식사를 했어.”
“회장님께서 대통령을 만나 저녁을 드신 것이 저랑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래도 (자동차 사업) 허가를 안 해주겠나?”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봐도 승용차 생산이 포화 상태에 있는데 그런 사업을 해서 이익을 낼 수 있겠습니까?”
“매년 5000억원씩 10년 동안 적자를 내도 괜찮다니깐.”

대통령과 식사를 한 회장님은 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다. 또 삼성에 자동차 사업 허가를 안 내주고 끝까지 버틴 이는 ‘경제민주화의 아이콘’ 김종인이다. 그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노태우 대통령을 보좌했다. 이 대화는 2020년 출간된 김종인의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처음 공개됐다.

‘삼성자동차의 탄생 비화’ 정도로 가볍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재벌의 금융 활용법을 살펴보려면 좀 더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0년 적자 자신감 뒤엔 삼성생명 있었다

지금이야 삼성그룹 자산에서 5000억원은 그리 큰 돈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대화가 오간 시점은 1991년. 당시 시간당 최저임금이 700원(현재 9860원), 강남 압구정 35평 아파트 가격이 3억~4억원(현재 35억~45억원)이다. 1991년의 5000억원은 현재 가치로 최소 5조원 이상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때문에 당시 대화를 2024년 버전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매년 5조원씩 10년 동안 50조원 적자를 내도 버틸 자신이 있으니 자동차사업 허가권을 달라.”

아무리 재벌이라지만 삼성 총수의 상식을 뛰어넘는 자신감은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답은 금융계열사 ‘삼성생명’에 있다. 삼성그룹의 ‘자동차 흑역사’에서 삼성생명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삼성생명이 없었다면 현재 삼성전자 성공 스토리는 전개 자체가 불가능했다.

자동차 사업 진출 초기에는 그룹의 자금줄로서 인수합병(M&A)의 첨병 역할을 했다. 김종인이 1992년 경제수석에서 물러나자 그 해 바로 삼성그룹에 자동차사업 승인이 떨어졌다. 승용차 부문은 진출하지 않고 상용차만 만들겠다는 약속이 먹혔다. 하지만 이는 허가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고 삼성은 1년도 안 돼 이를 번복한다. 그리고 4개월 뒤 삼성생명을 통해 은밀하게 기아자동차 지분 확보에 나선다.

당시 자동차 시장은 현대, 대우, 기아, 쌍용 등 이미 4개 회사가 경쟁 중이었다. 5번째로 진출하는 업체가 제로 베이스에서 사업을 시작할 경우 새로 공장을 짓고 인력을 뽑는 데만 최소 수 년이 걸린다. 적당한 가격에 M&A에 성공하면 돈과 시간 모두 아낄 수 있다. 게다가 기아와 쌍용은 만년 적자기업이었다. 그 중에서도 생산 및 수출 규모가 크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던 기아는 M&A의 훌륭한 타깃이었다. 이에 그룹은 삼성생명을 통해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아자동차에 담보대출을 진행하는 한편, 물밑으로는 주식 매입에 나선다.

■ "기아 부도는 삼성탓"...김선홍의 울분

하지만 삼성의 신수종사업 내부 보고서가 유출되고, 기아차 지분 매입 사실도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삼성의 동태를 수상히 여긴 기아차 측에서 내부 정보팀을 구성해 적극 대응에 나선 결과다. 인수하려던 기아차가 잇따른 폭로를 하자 삼성은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결국 M&A를 포기하고 독자 진출 쪽으로 방향을 튼다. 1994년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도입 계약을 맺고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인 부산에 승용차 공장을 짓는다.

그렇다고 삼성이 M&A 생각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후 기아차 소하리공장을 불법 촬영하다 들키는가 하면, 쌍용차 인수합병 추진이 시장에 알려지기도 했다. 삼성의 M&A 여부는 업계의 상시 핫이슈였다. 당시 기아차의 김선홍 회장은 본업인 자동차 사업보다 M&A 방어에 더 신경을 쓰다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실제로 기아차는 1997년 상반기 부도설에 시달리다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해 말 IMF 외환위기를 불러온 직접적 원인이라는 오명까지 덮어썼다.

1999년 1월 국회서 열린 ‘IMF 환란원인 규명과 경제위기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에서 김선홍 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기아 부도는 삼성 때문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5월부터 (삼성이 퍼뜨린 나쁜) 설에 의해 우리가 자금회수를 당한 것이 5500억원”이라며 “내 목이 떨어져도 (삼성 때문에 부도가 났다는 것은) 옳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삼성은 이를 부인했지만 ‘삼성 음모설’은 그로부터 6년 뒤인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회자되며 삼성그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건희 회장은 5000억원씩 10년 간 적자를 보는 것을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삼았지만 그 순간은 예상보다 일찍 왔다. 당초 1조3000억원 정도면 부산 공장이 완성될 것으로 계획했지만 실제로는 4조원 넘게 투입됐다. 1998년 3월 첫 양산 모델인 SM5가 출시됐는데 나라가 외환위기의 구렁텅이에 빠진 시점이었다.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실업자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자동차 판매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게다가 생산 단가가 너무 높아 자동차가 1대씩 팔릴 때마다 이익은커녕 150만원씩 손실이 났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삼성은 결국 내홍 끝에 1999년 6월 법정관리를 신청한다. 승용차 사업 허가 4년 6개월 만이었다.

■ 그룹 자금줄 '삼성생명' 통해 퇴로 확보

보통의 대기업이었다면 재기 불능이었겠지만 삼성은 달랐다. 그룹의 자금줄 삼성생명의 존재감이 또 한번 빛을 발한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이 소유한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내놓으며 퇴로를 확보했다. 당시 채권단이 보유한 삼성자동차 부채는 2조4500억원이었으므로 삼성생명 1주당 70만원의 가치가 매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대기업 총수는 경영권 박탈은 물론 구속까지 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이건희 회장은 삼성생명 지분을 지렛대로 악화된 민심을 돌리고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뒤 진행된 일은 그다지 깔끔하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1999년 8월 이건희 회장이 채권단과 작성한 합의서에는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2000년 12월 31일까지 처분해 지급한다’고 적시됐지만 삼성생명 상장이 불발되면서 약속 이행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채권 시효 소멸을 앞두고 결국 채권단은 2005년 12월 소송을 제기하고 삼성은 표정을 싹 바꿔 ‘합의서 무효’를 주장하며 맞섰다. 삼성생명 상장은 2010년에야 이루어지는데 공모가(110만원)가 70만원을 훌쩍 넘어서면서 비로소 합의서 이행의 단초가 마련됐다. 2000년 전후 상장했다면 20만원 가치도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회고한다. 안 갚고 버티면서 끝내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 낸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받았던 압력과 회유를 가슴에 새겼던 것일까. 김종인은 2006년 국회의원 시절 “삼성은 2조원을 웃도는 삼성자동차 부채를 왜 아직도 갚지 않느냐”며 이건희 회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재경위 표결에서 부결돼 이 회장이 국감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종인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한탄한다.

“5000억씩 10년간 적자를 내도 된다는 말을 어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기업의 자산을 개인의 쌈짓돈 정도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배어있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생각이다.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재벌 기업이, 그렇게 자원을 소각하듯 하늘에 날려버려도 되는 것인가. (중략) 내가 경제수석 자리에서 물러나니 2개월만에 그 재벌의 자동차 사업은 승인이 떨어졌다. 역시 상용차뿐 아니라 승용차까지 생산하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상용차 부문이 먼저 날아갔고, 승용차도 문제가 생겨 결국 외국 기업에 넘어갔다. 그렇게 5조원 가량을 허공에 날렸다. 한 사람의 소원을 위해 5조원을 소각한 셈이다. 국가 경제의 합리성이란 개념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민사접수 창구에서 삼성생명 유배당 보험 계약자들과 소송대리인들이 상장을 준비중인 삼성생명이 상장전에 '유배당 계약자 이익배당금 10조원 지급하라'는 내용의 소송의 소장을 접수하고 있다. 상장 차익 분배 문제로 삼성생명의 상장이 늦춰지면서 삼성자동차 채권단은 10년 넘도록 약 5조원의 채권을 회수하지 못했다. 2010.2.22(자료=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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