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공회의소 등이 지난 8월 20일 내놓은 '기업성장 포럼 발족 킥오프 회의' 보도자료 중에서(자료=대한상의·한경협)

위 표는 지난 8월 20일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기업성장포럼 발족 킥오프 회의’에서 공개한 것입니다. 최근 20년 동안 미국의 10대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 한 곳을 빼고는 모두 바뀐 반면, 한국의 10대 기업은 두 곳만 빼고 모두 그대로입니다. HD현대가 1970년대 재벌 1세대 기업인 현대중공업의 후신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바뀐 기업은 농협 한 곳뿐입니다. 농협 역시 정부의 정책적 배려로 성장했으니 혁신기업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애플, 알파벳, 아마존, 엔비디아, 메타, 테슬라 등 신흥 기술기업이 즐비한 미국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한경협 등 재계는 정부의 규제를 원인으로 짚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경제가 미국에 비해 역동성이 크게 떨어지는 이유는 법제 전반에 녹아있는 규모별 차등규제로 성장할 유인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진단이 이러하니 해법도 규제 완화로 귀결됩니다. 미국처럼 역동성을 회복하려면 “기업규모가 아닌 산업별 특성에 따른 규제 방식으로 정비하되, 궁극적으로는 일정한 규제 원칙만 정하고 자율규범 체계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입니다. 글로벌 패권경쟁이 치열한 첨단산업군에 한해 금산분리, 동일인 규제 등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은 “기업 생태계의 무게중심을 ‘생존’에서 ‘스케일업’으로 옮겨야 할 때”라며 “될성부른 떡잎(기업)을 잘 선별해 물과 거름을 듬뿍 줘야 울창한 숲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CVC의 외부자금 출자 한도(현행 40%) 확대로 성장성 있는 기업들에게 풍부한 자금이 유입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의 접견에 앞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용범 정책실장, 김정관 산업부 장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샘 올트먼 오픈AI CEO, 이재명 대통령, 최태원 SK그룹 회장, 배경훈 과기부 장관, 강훈식 비서실장. 2025.10.1(사진=연합뉴스)

8월 당시 이들 3개 단체가 내린 진단과 처방은 그대로 정부에 전달돼 9월 ‘국민성장펀드 국민보고대회’ 현장에서 대통령에게 전해집니다. 대통령실과 관계 부처들이 사전에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짠 행사로, 혹여 재벌의 요구사항으로 비칠까 자수성가형 기업가인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을 내세운 점이 흥미롭습니다. 10월에는 샘 올트먼 오픈AI CEO 방한을 계기로 이 대통령이 직접 금산분리 완화를 지시하기에 이릅니다. 곁에는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배석 중이었습니다. 8월에 제안된 금산분리 완화, 구체적으로는 CVC 규제 완화 요구가 두 달도 채 안 돼 초고속으로 정부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런데 재계의 진단과 처방은 과연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최근 20년 동안 한국 10대 기업은 거의 변화가 없는데 미국 10대 기업은 확 바뀐 이유가 뭔지 인공지능(AI)에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대답이 나옵니다.

“한국은 재벌 중심 구조로 상위 기업이 고착돼 있고, 미국은 벤처·자본시장·규제 환경이 결합돼 상위 기업이 계속 교체되는 ‘창조적 파괴’가 더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한국은 삼성·현대차·SK·LG 같은 재벌 그룹이 계열사 내부거래, 금융·유통·건설까지 아우르는 수직·수평 계열화로 자산·매출·고용·수출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해 신규 기업이 성장하기 어려운 반면, 미국은 독점 규제, 반트러스트 소송 가능성, 주주 행동주의 등으로 기존 대기업의 시장지배력이 견제되면서 신생 기업이 올라올 공간이 생긴다는 분석이었습니다.

한국 10대 기업의 지각변동을 막는 구조적 요인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자 더 구체적인 대답이 나옵니다.

“재벌 중심 산업조직, 시장지배력과 진입장벽, 자본·인재 쏠림, 그리고 정책·금융 구조의 관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소수 대규모 기업집단이 제조·서비스 핵심 산업에서 과점 구조를 형성해 새로운 독립 기업이 시가총액 상위권까지 성장할 기회가 제한되고, 가격·공급·유통에서 구조적 우위를 가진 덕분에 대형 신생 기업이 등장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또한 우수 인재와 핵심 기술, R&D(연구개발) 자원이 재벌에 집중돼 있어 혁신이 그룹 내부로 흡수되기 쉬운 점도 신생 기업에게는 불리한 요소라고 짚었습니다. 아울러 정부 차원에서도 거시경제·고용·수출 안정 측면에서 대기업집단 의존도가 커 정책 설계에서 암묵적으로 재벌이 중시되고, 위기 상황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까지 지적했습니다.

AI가 빅데이터를 종합적으로 검토·분석해 내놓은 답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의 답변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왜 대한민국이 AI 경쟁력 확보를 위해 사활을 걸어야 하는지 수긍이 갈 만큼 똑똑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재계의 분석이 아전인수식 해석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분명 재계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역사로 보나, 여론으로 보나 오히려 AI의 답변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보는 편이 상식에 가까울 겁니다. 굳이 AI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대기업집단(재벌)’과 ‘경제력 집중’을 키워드로 논문 검색을 해보면 그 폐해를 지적하는 내용이 차고 넘칩니다. AI가 내린 결론은 그런 집단지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일 뿐일 겁니다.

무엇보다 2025년 미국 10대 기업을 일군 기업인들은 모두 자수성가형 억만장자들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협동조합인 농협을 빼면 9곳 모두 재벌 2·3·4세 상속형 기업인들입니다. 이들이 선대의 부를 유지·확장하기 위해 소수의 지분으로 황제 경영을 일삼으며 악착같이 신사업 기회를 독식하려 몰두하는 모습을 서민들은 너무 오랫동안 지켜봐 와서 경제력 집중을 상식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진단이 정확해야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처방으로 이어져 병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재계의 진단이 맞다면 재계가 내린 처방으로 한국경제가 역동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재계의 진단이 틀렸다면 한국경제의 역동성은 더욱더 기대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럼에도 나라의 미래가 걸린 중차대한 결정을 두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부와 여당의 모습은 서두르는 분위기가 역력해 보입니다.

지난 9월 ‘국민성장펀드 국민보고대회’에는 AI 스타트업 대표주자로 퓨리오사AI가 참석했습니다. 재계의 진단과 처방이 맞다면 미래 10대 기업에는 퓨리오사AI가 삼성과 SK와 어깨를 견주거나 순위에 올라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그럴 확률이 과연 몇 %라고 보십니까.

‘생산적 금융’을 빼놓고 이재명 정부의 금융정책을 논하기 어렵습니다. 잠재성장률 반등을 위해서는 AI 등 미래전략산업 육성이 필요하고, 미래전략산업을 육성하려면 ‘생산적 금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여기까지는 크게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생산적 금융’을 위해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하고, 국민성장펀드의 성공을 위해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왜 그러한지 가급적 편견 없이 몇몇 쟁점을 도마 위에 올려 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