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금융’을 빼놓고 이재명 정부의 금융정책을 논하기 어렵습니다. 잠재성장률 반등을 위해서는 AI 등 미래전략산업 육성이 필요하고, 미래전략산업을 육성하려면 ‘생산적 금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여기까지는 크게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생산적 금융’을 위해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하고, 국민성장펀드의 성공을 위해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왜 그러한지 가급적 편견 없이 몇몇 쟁점을 도마 위에 올려 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서울 마포구 프론트원에서 열린 국민성장펀드 보고대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발언하고 있다. 2025.9.10(사진=연합뉴스)

2025년 9월 10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프론트원(Front1) 1층 로비에선 ‘국민성장펀드 국민보고대회’가 열렸습니다. 프론트원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개관한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 복합 지원공간입니다. 당시 ‘코로나19’의 힘겨운 나날임에도 혁신창업을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겠다는 정부와 여당의 의지가 스며있는 뜻깊은 공간입니다.

금융위원회의 ‘국민성장펀드 운용전략’ 주제 발표 후 이어진 자유토론 시간. 3년 만에 정권을 되찾아 감회가 남다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과 이재명 대통령 앞에서 첨단전략산업 기업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한 서정진 셀트리온 대표가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의 분리) 완화 얘기를 꺼냅니다.

“오래된 숙제인 금산분리 제도를 바꿔줬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께서 연구개발(R&D) 투자를 많이 강조하시는데 성공률을 높이려면 스타트업이 많아야 합니다. 여기에 돈을 주는 곳은 벤처캐피탈입니다. 벤처캐피탈이 금융기관을 끼고 정부 펀드가 같이 들어가면 성공률이 높아지지만 금산분리 제도로 대기업은 이를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GP(운용사)가 아니라 Co-GP(공동 운용사)만 허용해 줘도 현재 5000억원인 펀드를 1조원까지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이 후배 스타트업을 키울 경우 50대 대기업이 한 회사당 30개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국내 5대 금융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신한금융그룹 진옥동 회장도 옆에서 힘을 보탭니다.

“5년 전 은행장 시절에 부탁드렸던 게 CVC 금산분리 완화였습니다. CVC가 GP 역할을 해준다면 은행권도 같이 들어가 (투자) 파이가 커질 수 있습니다. CVC를 금산분리로 묶어놓은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겁니다. CVC에 금산분리를 제외해 주시면 셀트리온이 5000만원을 투자할 때 은행은 5억원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금융회사는 (첨단기술 관련) 전문 지식이 없기 때문에 (대기업과 금융기관이 함께 들어가는) 그런 형태로 CVC가 개선됐으면 합니다.”

CVC(Cooperate Venture Capital)는 벤처캐피탈 중에서도 대기업이 출자한 벤처캐피탈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보통 ‘기업형 벤처캐피탈’,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로 번역됩니다.

설립 주체 외에 VC와 CVC의 가장 큰 차이점은 투자 목적입니다. VC가 주로 재무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반면, CVC는 재무적 이익에 더해 전략적 이익을 추구합니다. 자사가 영위 중인 사업 분야와 관련해 신사업 확장이나 기술 확보 목적으로 벤처 기업에 집중 투자합니다.

자수성가형 기업가인 서정진 회장은 셀트리온홀딩스를 투자형 지주회사로 키우고 싶어 합니다. 100조원 규모의 글로벌 헬스케어 펀드를 조성해 제2, 제3의 성장동력을 발굴하겠다는 전략입니다. 의약품 개발에 통상 10년 이상이 소요되는 제약바이오 비즈니스의 특성상 셀트리온 혼자만의 노력으로 글로벌 다국적 제약회사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습니다. 전도유망한 국내외 스타트업들에 동시다발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성장 전략입니다. BTS라는 빅히트 상품을 출시한 하이브가 산하에 다양한 레이블을 운영하며 제2의 BTS를 발굴해 키우려는 것과 같은 전략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국내 은행지주 또한 담보대출 중심의 손쉬운 영업에서 벗어나 해외 선진 금융회사들처럼 투자금융을 통해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는 것이 숙원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나날이 고도화되는 첨단기술 비즈니스 영역에서 기업의 옥석을 구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이 그 역할을 일정 부분 맡아준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삼성전자가 투자하는 스타트업, 셀트리온이 투자하는 스타트업이라면 신한금융도 기꺼이 투자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진옥동 회장이 대통령에게 건의한 CVC 금산분리 완화에는 이런 배경이 내포돼 있습니다.

이전 윤석열 정부에서도 ‘금산분리’가 종종 이슈로 등장하긴 했습니다. 다만 서정진 회장과 진옥동 회장이 요청한 CVC 규제완화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금융과 비금융의 경계가 모호한 ‘빅블러(Big Blur)’ 시대를 맞아 금융이 산업의 영역을 좀 더 소화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으로, 산업이 금융을 더 다룰 수 있게 해달라는 CVC 규제완화와는 출발선이 다릅니다. 금산분리 규제 자체가 재벌 등 대기업들의 문어발 경영을 막기 위해 도입됐기 때문에 산업에 금융 기능을 더 부여하자는 주장은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금기에 가까웠는데 서 회장과 진 회장이 이 금기를 깬 겁니다.

그로부터 3주 뒤 샘 올트먼 오픈AI CEO 방한을 계기로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금산분리 규제완화 검토를 지시합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오픈AI와 파트너십을 체결했는데, 막대한 투자 재원을 조달할 때 산업자본이 직접 금융자본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는 지시였습니다. 사회적 파장을 의식해서였는지 이 대통령은 이튿날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독점 폐해 없는 매우 특수한 영역에 한정해 우리 사회 논의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제안이었다”는 설명을 곁들입니다. AI 등 특정 영역 외 다른 영역으로 규제 완화가 번지지 않도록 안전장치가 마련된 범위 내에서 현행 규제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단 겁니다.

이후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일부 의원들이 금산분리 규제완화 필요성을 제기했고, 신임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금산분리 취지와 AI 등 첨단전략산업 투자 촉진 필요성을 모두 고려해 규제 완화 필요성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모 방송에 출연해 “산업자본이 GP(운용사)가 될 수 없는 건 시대착오적”이라면서 여론몰이에 나섰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자금을 AI 산업에 쏟아붓고 있는 상황에서 통상적 방식만으로는 자금 조달에 한계가 있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금산분리 완화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웠지만 10월말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거치면서 상당히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바뀝니다. 이 대통령은 휴일인 지난 16일 오후 한미 관세협상 후속조치를 위한 민관 합동회의를 연 자리에서 재계 총수들에게 “친기업, 반기업 이런 소리를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규제 완화, 철폐 등 가능한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면 제가 신속하게 정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재계의 헌신으로 한미 관세협상이 잘 타결된 만큼 규제와 관련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입니다.

재계 입장에서는 좀처럼 열리지 않던 ‘기회의 문’이 열렸습니다.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합니다. 준비는 오래 전부터 해왔습니다. 한국경제인협회(회장 류진)는 지난 12일 ‘생산적 금융 활성화를 위한 제도 개선 과제’ 보고서를 이미 발표합니다. CVC 규제 완화 등 총 20개 요구사항이 담겼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끄는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보다 앞서 지난 9월부터 ‘K성장 시리즈’라는 보고서를 연이어 내놓으며 규제 완화 및 철폐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입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이 APEC 정상회담과 한미 관세협상에서 보여준 기업인들의 노고에 대한 정치적 수사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대통령의 약속대로 재계의 요구가 현실화될 경우 대한민국 경제에는 상당한 파장이 예상됩니다. 기업 지배구조, 경영승계 등 매우 민감한 이슈들과도 연결돼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첨예한 사회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대통령 발언 다음날인 17일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는 “AI·반도체 재벌 지배구조 특혜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는 논평을 냈습니다. 특히 재계의 CVC 규제 완화 요구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에서 낸 금산분리 원칙 구멍을 이재명 정부가 더 크게 키우려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참여연대의 지적처럼 CVC 이슈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지주회사의 CVC 소유 허용 법안이 통과될 당시 찬반 논리가 팽팽히 맞섰습니다. 여야 간 대립이 아닌, 도입을 주도했던 더불어민주당 내에서조차 그랬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2회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