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자료=신한금융)
“회장후보추천위원회는 그룹 내·외부로부터 회장 후보자 발굴 및 자격요건 검증 등을 통해 회장 후보자군(Long List)을 선정·관리한다.” -KB금융 경영승계규정 제5조(회장 후보자군 관리) 1항
“회장후보추천위원회는 최고경영자 후보군 탐색 시 필요할 경우 주주, 이해관계자 및 외부 자문기관 등 회사 외부로부터의 추천을 활용할 수 있다.” -신한금융 회장후보추천위원회규정 제9조(대표이사 회장 후보 추천 및 검증 등) 3항
가장 최근 공개된 지배구조 공시에 따르면 회장 후보자군을 선정함에 있어 KB금융의 경우 그룹 내·외부 인사를 동일 선상에 두고 있는 반면, 신한금융은 ‘필요할 경우 외부 추천을 활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내부 인사를 우선적으로 회장 후보자로 고려하되, 여의치 않으면 외부 인사를 물색하겠다는 ‘선내부, 후외부’ 방침이다.
규정에서 ‘한다’와 ‘할 수 있다’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다. KB금융과 신한금융 공히 국민연금공단이 1대 주주이지만 경영승계규정에 이렇게 온도 차가 존재하는 것은 주주 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한금융은 1982년 재일동포 소액주주 341명의 자본금(259억원)으로 출발했기에 ‘오너십’이 발휘되는 회사다. 지금도 수 천명의 재일동포 주주들이 총합 10%대 지분으로 사외이사 9명 중 3명의 추천권을 행사한다. 오너십이 존재하지 않는 KB금융과 달리 신한금융은 재일동포 그룹이 사실상 오너십을 갖고 국내 인사에 경영을 위탁하는 지배구조라 할 수 있다.
재일동포 그룹이 믿고 경영을 맡긴 국내 핵심 인물이 라응찬 전 회장이다. 1977년 신한은행의 전신인 제일투자금융 설립 당시 이사로 영입돼 1991년 은행장에 올랐고 2010년까지 최고경영자 지위를 유지했다. 박정희부터 이명박까지 8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 재일동포 주주들과 소통하며 신한금융을 키우고 이끈 주인공이다. 라응찬의 장기 집권 영향으로 신한금융은 사실 경영승계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했다. 재일동포 주주들도 굳이 CEO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평화가 영원할 순 없는 법. 2003년 조흥은행 인수 무렵부터 조금씩 누적된 내부 갈등이 2010년 ‘신한 사태’라는 큰 사건으로 드러났다. 신한은행이 부정대출 및 배임·횡령 혐의로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고소한 배경에는 라응찬 회장과 신상훈 사장 간 갈등이 있었다. 라 회장은 2008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비자금 및 차명계좌 의혹에 시달렸고 신한금융 내부에서는 라 회장의 퇴임론과 연임론이 혼재했다. 문제는 2인자인 신 사장이 퇴임론쪽으로 기울었고, 이에 분개한 라 회장이 서열 3위인 이백순 신한은행장을 끌어들여 신상훈 축출 작업에 나선 것이 ‘신한 사태’의 대략적인 개요다.
자신이 키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라 회장은 당시 회장직 4연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수칠 때 떠나지 않았다. 결국 라 회장의 무리수는 신한금융 서열 1~3위의 동반 퇴진으로 귀결된다.
2011년 한동우 회장 체제로 수습됐지만 상흔은 깊었다. 신한금융에서 사장 직위는 사라졌다. 내·외부 경쟁은커녕 내부 경쟁마저 금기시됐다. 지주 회장 아래 은행, 카드, 보험 순서로 계열사 서열이 매겨지고, 은행장이 차기 회장으로 낙점되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신상훈 사장의 법정 투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후계자를 경쟁시키는 조직 문화는 언감생심이었다. 금융당국이 마련한 ‘지배구조 모범관행’에서 신한금융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게 된 배경이다.
다만, 신한금융은 2023년 금감원 정기검사에서 경영승계 절차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제고하라는 금감원의 권고를 받고, 지난해 이사회를 통해 지배구조 모범관행 취지에 맞춰 내외부 후보를 상시 관리하는 방식으로 회장후보추천위원회 내규를 개정했다.
신한금융 관계자는 "외부후보 상시 관리 규정과 회장 선출 규정이 바뀌어 현재 이미 운영 중에 있다"며 다만 올해 3월 주총을 거쳐 대내외에 공개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신한금융뿐만 아니라 재일동포 주주들 사이에서도 균열이 생겼다는 것. 재일동포 1세대는 고 이희건 씨(신한금융 명예회장)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지만 2세대, 3세대로 이어지면서 주주 인원이 크게 늘어나고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지역별로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일례로 ‘신한 사태’ 당시 도쿄 주주들은 라응찬 회장에, 오사카 주주들은 신상훈 사장에 각각 우호적인 입장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희건 명예회장이 2002년 배임 혐의로 일본 경찰에 구속된 이후로는 재일동포 특유의 단합된 분위기가 많이 흐트러졌다고 한다. 재일동포 주주들의 균열은 신한금융 지배구조에 다시 한 번 변화가 발생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2011~2016년 신한금융을 이끈 한동우 회장이 라응찬 라인임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는 중립 성향의 조용병이 낙점됐다. 내부 파벌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 온 한 회장이 계파색이 옅은 조용병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는 평이 나왔다. 재일동포 그룹과 별 인연이 없던 조용병 회장은 취임 이후 IMM, 어피니티, EQT 등 사모펀드의 투자를 유치하며 사외이사 수를 12명까지 늘렸다. 이는 재일동포 주주들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했다. 조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연임에 성공했지만 세 번째 임기 도전에는 실패했다. 뒤를 이은 진옥동 회장은 일본 현지 근무 경력만 18년에 달해 재일동포 주주들의 이해관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2023년 3월 임기를 시작한 진 회장은 사외이사 수를 다시 9명으로 줄이고 신상훈 사장과의 화해도 중재했다. 인사의 경우 ‘전쟁 중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며 임기 첫 해 자회사 CEO 전원 유임을 결정했지만 이듬해는 달랐다. ‘바람이 바뀌면 돛을 조정해야 한다’며 지난해 말 13개 자회사 중 9명의 CEO를 교체했다. 신한금융은 이번 인사의 특징을 △고강도 인적쇄신을 통한 조직 체질 개선 △경영능력 입증된 CEO 연임으로 일관성 있는 미래전략 추진 가속화 △세대교체를 통한 차세대 리더 적극 발탁 등으로 요약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교체된 9개사 대표 가운데 5명이 본부장급에서 발탁됐다는 점이다. 특히 그룹 내 서열 2위인 신한카드의 경우 박창훈 본부장이 부사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CEO로 직행해 눈길을 끌었다. 그룹 내에서는 충격적인 인사로 받아들여졌다. 카드 외에 저축은행, DS, 펀드, 리츠운용도 본부장급에서 대표가 뽑혔다. 반면, 신한은행은 정상혁 행장이 관례를 깨고 1년이 아닌 2년 기간으로 연임됐다. 1년 연임의 경우 진 회장과 정 행장이 동시에 임기 만료를 맞게 되는데 이를 피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종합해 보면 신한금융의 지배구조는 재일동포 그룹의 공고한 지지를 기반으로 진 회장의 연임이 확실시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신한라이프 이영종 사장의 연임을 1년으로 제한한 것과 달리 정상혁 행장의 임기를 2년 보장함으로써 차기 회장은 정 행장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또 다른 주요 자회사인 신한카드 대표를 본부장급으로 파격 발탁해 후계 경쟁 구도가 형성되는 것 또한 미연에 방지했다. 세대교체 명목으로 진 회장의 친정체제도 강화됐다. 결국 특별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1인자 진옥동, 2인자 정상혁 체제로 최소 4년을 끌고 가는 그림이다.
‘신한 사태’의 아픔을 치유하는 측면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지로 보인다. 다른 금융지주와 달리 재일동포라는 오너십이 존재하는 특수 여건 또한 예측 가능한 ‘원톱 체제’의 당위성과 설득력을 높인다. 다만, 표준 잣대인 당국의 ‘모범관행’ 기준으로 봤을 때는 의문 부호가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모범관행에서는 회장 후보 선정과 관련,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후보군에 대한 평가주체 및 평가방식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외부평가기관, 외부전문가, 심층 평판조회, 다면 평가 등 평가주체 및 방식을 다양하게 활용하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신한금융처럼 후계 구도가 명확할 경우 이 모든 과정은 요식 행위에 그칠 공산이 크다. 내부 후보든, 외부 후보든 형식적인 들러리로 세울 바에야 경쟁 없이 합의 추대로 회장을 선출하는 것이 효율적이겠지만 ‘모범관행’까지 나온 마당에 대놓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모범관행이란 것이 ‘셀프 연임’을 통한 제왕적 지위 구축 방지가 핵심 취지인 점을 고려하면 결국 제도 개선 못지않게 현직 회장의 의지 여부가 바람직한 지배구조 정착의 키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스스로 과욕을 경계하며 적정선에서 큰 잡음없이 경영승계를 완수하겠다는 의지 말이다.
금융당국은 2023년 12월 ‘은행지주·은행의 지배구조에 관한 모범관행’을 발표했다. ‘셀프 연임’ 등 국내 은행의 지배구조가 글로벌 기준에 비해 미흡하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였다. 5대 금융지주는 당국이 제시한 ‘모범관행’을 준수하기 위해 지난 한 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정기인사를 마무리했다. 발표 이후 1년이 지난 시점, 각 금융지주들이 ‘모범관행’에 얼마나 근접했는지 점검해본다. - 편집자주
자료=금융감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