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KB골든라이프 보고서』는 5월 30일부터 6월 18일까지 서울을 비롯해 전국 주요 도시에 거주하는 25~74세 남녀 3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정량조사)와 별도 패널을 대상으로 한 표적집단심층면접(정성조사) 결과를 토대로 작성됐으며,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자료=KB금융)

2018년 개봉된 ‘인생 후르츠(Life is Fruity)’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90세 할아버지와 87세 할머니 부부는 50년 동안 살아온 자신의 집에서 과일 70종, 채소 50종을 키우며 살아갑니다. ‘모든 해답은 위대한 자연 속에 있다’고 믿는 노부부는 과일과 채소를 가꾸며 자연 속에서 해답을 찾고, 자연과 동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래서인지 부부의 낡고 오랜 집은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부부 또한 그렇게 느껴집니다.

노부부의 일상과 사계가 담긴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할아버지는 실제로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언제나처럼 텃밭을 가꾸며 소소한 집안일들을 처리하고 잠이 든 어느 날 밤, 마치 꿈을 꾸듯 조용히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의 교과서 같은 이들 부부의 삶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묵직하고 잔잔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영화를 보며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한국에서도 이러한 삶의 방식(life style)이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얼핏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이 지난달 한 보도자료를 접하면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KB금융그룹이 발간한 ‘KB골든라이프 보고서’인데요, KB금융이 2017년부터 2~3년마다 내놓고 있는 ‘은퇴 및 노후준비 지침서’입니다. 올해 네 번째로 발간된 보고서에는 ‘한국인의 에이징 인 플레이스(AIP)’라는 챕터가 단독 챕터로 승격돼 눈길을 끌었습니다. 덕분에 AIP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됐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AIP는 1970년대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노인요양시설 위주의 돌봄이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생겨난 용어입니다. 재가복지(home and community based care) 개념이 발전하면서 1980년대 미국 미국퇴직자협회(AARP)의 ‘고령자 조사·보고서’에서 처음 거론됐습니다. 이후 1990년대 북유럽 복지국가인 덴마크, 스웨덴 등과 일본에서 ‘지역사회 돌봄’ 정책으로 도입됐고, 한국에서도 2000년대 들어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AIP는 고령자가 원하는 편안한 삶과 존엄을 지켜주는 지원 체계의 의미를 넘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설 중심의 고비용 돌봄 대신 지역사회 중심의 지속가능한 돌봄 체계로 나아가는 사회복지적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이런 트렌드는 통계 조사에서도 확인됩니다. 살던 집과 동네에서 나이들고 싶은 AIP에 동의하는 응답자는 80.4%로, 이전 조사(2023년)에 비해 14.3%포인트나 늘었습니다. 남성(77.2%)보다 여성(85.0%)이 더 높은 동의율을 나타낸 것으로 봤을 때 여성이 남성보다 지역 기반의 인적 네트워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AIP에서 ‘동네’의 물리적 범위는 어느 정도 거리를 말하는 걸까요. 10명 중 4명(39.2%)은 ‘도보 30분 이내’ 거리라고 응답했습니다. 전철역 한두 정거장, 도보 10~15분 내의 익숙한 생활반경을 ‘동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AIP에 중요한 인프라로는 의료, 교통, 공원, 쇼핑 순의 선호도를 보였습니다. AIP 구현에 가장 큰 우려사항으로는 ‘간병’을 꼽았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배우자나 가족의 건강 악화로 간병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AIP가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입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AIP는 개념조차 불필요한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돼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몰려 사는 2025년 한국의 AIP는 아무나 결심할 수 없는, 돈과 건강이 뒷받침돼야 하는 ‘남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훨씬 더 풍요로워진 것 같은데 삶의 균형감각을 찾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은 비단 저만의 느낌일까요.

연차 하루만 쓰면(못 쓰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ㅠ.ㅠ) 10일 동안 쉴 수 있는 슈퍼 황금 연휴입니다. 지금 고향으로 가고 계신가요. 찾아갈 고향이 있다는 건 가족 중 누군가는 AIP를 구현 중이라는 것이겠죠. 저도 90을 바라보는 노모가 AIP 중이셔서 찾아갈 곳이 있습니다. 20~30대 제 앞가림 하기 바쁠 때는 이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고 행복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황금 연휴에는 남들의 해외여행을 부러워하기보다, 현재 나의 AIP에 감사하며,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지속가능한 AIP’를 의논해 보려 합니다. 답은 영화 속 노부부의 대화에서 얼추 찾은 것 같습니다.

할머니 : 가끔 당신은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할아버지 : 없어요.
할머니 : 나는 마지막이 어떻게 될까 가끔 생각해요.
할아버지 : 생각한들 별 수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