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AI 세상이다. 2016년 인류에 경종을 울린 알파고의 등장 이후, 인공지능은 ‘신들의 게임’이라 불리는 바둑을 한순간에 장악했고, 최근 생성형 AI 챗GPT의 폭발적인 성장은 AI 패권 시대를 앞당겼다. 인공지능의 촉매제가 되었던 바둑을 통해서 문학, 미술, 음악 등 창작의 영역까지 일상에 스며든 AI 별천지를 둘러보고, 당면한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AI와 동행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
#1. 신들의 게임을 넘다 : 알파고의 출현
2024년 노벨상의 최대 화두는 단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이지만,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의 면면도 이채롭다. 양대 과학상 모두 전통적인 과학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AI 분야에서 배출된 것. 지난 124년간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주로 해당 분야의 기초적인 발견을 한 연구자들에게 수여했는데, 기초과학이 아닌 AI라는 응용과학자가 잇달아 선정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특히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구글 딥마인드 CEO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는 화학자가 아닐뿐더러, 지난 2016년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에서 ‘알파고의 아버지’로 친숙한 인물이다.
당시만 해도 인공지능은 인간의 두뇌를 넘어 승승장구하며 거칠 것이 없었다. IBM의 인공지능 체스 프로그램 딥블루(Deep Blue)는 체스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에게 승리했고, 대화형 인공지능 프로그램 왓슨(Watson)은 퀴즈쇼에서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2016년 이전까지 인공지능이 인간을 상대로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목표는 바둑이었다.
최후의 보루(堡壘) 바둑은 수많은 경우의 수, 패싸움, 세력과 두터움, 형세 판단 등 수치화하기 어려운 직관과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기 때문에 인공지능 개발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14년 딥러닝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하면서 인공지능 바둑의 기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구글과 페이스북의 딥러닝 과학자들이 바둑 연구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물이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였다.
“우주 내 원자 수 이상의 거대한 탐색 공간 속에서 직관, 상상력, 지적(知的) 깊이를 요구하는 바둑이야말로 인공지능 최적의 도전 대상이다” -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
바둑에 관심을 가진 벽안의 서양 과학자가 인간의 두뇌를 뛰어 넘겠다고 개발한 알파고(AlphaGo). 인간계의 대표는 다소 튀는 언행으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당대 최고수 이세돌 9단.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라는 이벤트는 인류 역사상 동서양이 이뤄낸 어떤 만남보다도 극적이고 짜릿한 매치업이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서울 한복판의 바둑판에 쏠렸다.
(자료=강헌주, 챗GPT 활용해 제작)
#2. AI 시대의 서막 : 이세돌 vs. 알파고
“인간의 직관이냐, 인공지능의 계산이냐”
최정상급 프로기사 이세돌을 상대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도전장을 던진 세기의 대결! 하지만 인공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신들의 게임’ 바둑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게 당시 대다수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빅매치를 앞두고 이세돌 역시 “과거 알파고와 판후이(樊麾, 프로기사) 대국을 보았을 때, 알파고는 실수가 잦고 수읽기도 아직 부족해 보여 내가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알파고의 4:1 승리!
인간에 대한 인공지능의 도전은 첫 착점부터 남달랐다. 인간으로서 프로기사라면 절대로 두지 않을 수(手), 심지어 악수로 보였던 수조차 알파고의 노림수로 변하면서 알파고는 첫 경기를 불계로 이겼다. 파죽지세로 2국과 3국까지 기세를 올렸다. 세계인들의 일방적인 응원에도 인간계의 초일류 기사는 벼랑 끝에 몰렸다. 충격적인 3연속 패배에도 승리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이세돌은 4국에서 힘겹게 1승을 거두며 체면치레했지만 전체적인 대국 내용은 알파고의 완승에 가까웠다.
인공지능은 무한대(이론상 1에 0이 360개 붙어 있는 10의 360승)에 이르는 경우의 수로 인해 체스와 달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바둑을 압도했다. 알파고는 어떻게 바둑으로 인간을 이길 수 있었을까.
알파고의 수읽기는 기존에 사용하던 강화학습(Reinforced Learning) 몬테카를로 트리서치(MCTS, Monte Carlo Tree Search) 바탕 위에 정책망(Policy Network)과 가치망(Value Network) 등 추가적인 핵심기법을 더했다. 다시 말해 기본 학습과 강화 학습을 통해 어디에 착점할지 결정하는 정책망, 그 착점에 대한 프로기사들의 경험과 직관을 더하는 탐색 과정, 그리고 형세 판단을 통해 그 착수의 승률을 측정하는 가치망까지 결합하는 식으로 완벽을 지향했다. 이들 알고리즘은 AI의 기초를 확립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존 홉필드(John Hopfield )와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이 토대를 구축한 인공 신경망 모델이었다.
당시 알파고의 승리에 전 세계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동양 ‘정신문화의 정수(精髓)’ 바둑을 서양 ‘물질문명의 첨단과학’ 알파고가 정복했다는 서사가 부여되면서 동양 vs. 서양, 문화 vs. 문명, 아날로그 vs. 디지털, 인간 vs. 기계 등의 대결 구도로 치환하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7일간의 여정을 마친 후, 데미스 허사비스는 이세돌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이겼다. 우리가 달에 착륙했다. 팀이 자랑스럽다”는 표현으로 알파고의 승리에 감격했다.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이세돌 9단은 “인류의 패배가 아니라, 인간 이세돌의 패배일 뿐”이라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인간의 두뇌를 뛰어넘은 알파고의 승리. 이는 단지 AI 시대의 화려한 서막을 알리는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강헌주 PD
■ 강헌주 PD는 바둑TV, 온게임넷(OGN), 투니버스 등에서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총괄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과 e스포츠의 중심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했고, 2003년 프로 단체전이 전무했던 시절 한국바둑리그를 기획하여 출범시켰다. 현재 KB바둑리그는 세계 최고의 바둑리그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