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제나 경제 뉴스를 읽다 보면 답답해서 한숨밖에 안 나온다. 어릴 적 학교 화장실 뒤로 불려가 불량스런 친구들한테 '삥'을 뜯기던 불쾌한 기억을 5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트럼프 2기 미국 정부가 각국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관세전쟁 수준이 그렇다. 트럼프가 교역상대국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을 날 것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그동안 미국이 전 세계의 시장이 되어 막대한 달러를 공급하고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감수해 왔지만, 이젠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이젠 호구짓 그만 하고 미국에 유리한 방식으로 무역의 룰을 다시 정하겠다. 각국은 미국이 정하는 15% 이상의 '상호관세'와 추가적인 관세를 부담하고 미국에 수출해야 한다. 이게 기분 나쁘다고 미국상품에 보복관세를 매기면 가만 안 놔둔다. 환율 절하 등의 꼼수로 대응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 미국의 문을 열어 두는 대신 각국이 미국에 거액의 투자를 해야 하고 특히 각국의 첨단산업들은 죄다 미국에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만들어 줘야 한다. 무기, 천연가스, 농산물 등 미국 상품은 비싸더라도 잔뜩 사줘야 한다. 이러다 보면 미국의 재정은 관세수입을 바탕으로 회복될 것이고 경제도 붐을 이루겠지만, 다른 나라 경기는 죽을 쑬거다. 그럼 각국 정부가 국방비 부담도 크게 늘리고 재정지출을 늘리는 등 알아서 경기부양을 해라. 경기위축을 이유로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줄이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 아니꼬우면 너네도 큰 나라 하던가."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이 지고 있는 막대한 재정부담을 교역상대국들에 그대로 전가하겠다는 것이고, 각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거시경제적 대응 대부분에 족쇄를 채우겠다는 뜻이다. 당장은 EU, 일본, 한국 등 주요국들이 각자 다른 나라보다 유리한 관세조건을 받는지 여부를 두고 일희일비하는 촌극을 벌이지만, 결국은 조삼모사다. 미국은 전 세계 경제에 엄청난 펀치를 날렸고, WTO 간판을 끌어 내리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세계경제가 미국의 뜻대로 갈 지, 보복관세와 환율전쟁의 극한 혼란속에서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됐던 글로벌 고도성장의 시대가 막을 내릴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중심에 취약한 우리 경제가 있다.
바꿀 수 없다면 즐겨야 하는게 세상 사는 이치.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교역 조건을 찾아내야 하고, 경제 성장의 전략도 미국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새롭게 짜야 한다. 그간 미국 시장을 무대로 급속하게 성장해왔던 거대 산업들이 더는 우리만의 효자가 될 수 없는 지금, 작은 것부터라도 하나씩 우리 살길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여지껏 우리가 무엇을 가장 잘 하는지 고민했다면 이제부터는 우리가 무엇을 아직도 잘 못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할 때다.
필자가 특별히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 관광산업의 문제를 한 번 들여다볼 때가 된 것 같다. 관광산업에 종사하는 기업들은 규모가 크지 않다. 하지만 이 기업들이 만들어 내는 부가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우리 관광 산업이 다른 나라보다 열악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 분야의 연간 부가가치 규모는 약 80~100조원 정도다. 우리 GDP의 4~5% 수준이다. 자동차, 화학, 기계 장비 등 우리 주력 제조업과 비교해 봐도 결코 비중이 적지 않다. 게다가 이 분야는 우리 서민들과 중소기업들이 주로 활약하는 내수업종이다. 관광이 활성화되면 숙박업, 유통업, 요식업 등 소상공인 업종으로도 그 흐름이 이어진다. 경제를 살리는 트리거포인트가 될 수 있다. 관광이란 것은 결국 사람이 이동하는 것이다. 막무가내로 관광객들을 체포라도 하지 않는 이상 관세전쟁처럼 억지로 흐름을 바꾸기도 어렵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2023년 기준 관광수지 적자가 149억달러, GDP의 0.78%에 달해 세계 최악의 관광 적자국이다. 팩트폭격이 아프지만, 수지 균형을 핑계로 이 분야 정부정책을 트집 잡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관광산업의 현실은 심각하다. 80년대 전국의 대학생들이 다 모여들었던 MT의 성지 강촌은 이젠 인적이 끊긴 한적한 시골 마을이 되었다 한다. 강원도나 경기도 일원, 멀게는 경남 남해지역까지 우후죽순처럼 지어졌던 팬션과 카페들 중에도 주인 없는 폐가나 공실이 늘고 있다. 우리 국민들부터 국내 관광지를 외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외국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23년에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100만 명 정도였지만 해외로 나간 우리 관광객은 3265만명에 달했다.
K-POP을 비롯한 충실한 문화 컨텐츠,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통합한 교통인프라와 IT선진국으로서의 편의성, 신속하고 편리한 공항 출입국시스템, 편리한 대중교통, 소매치기 한 명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안전한 치안, 세계 최고 수준의 화장실 인심, 성장하는 경제 규모와 글로벌 위상에 따른 세계적 인지도 확산 등 관광 수요 확대에 긍정적인 요소들이 적지 않음에도,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지 않는다면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진단했던 원인들을 보자. 우리 문화콘텐츠의 브랜드 파워가 약하고, K-컨텐츠와 관광도 연계가 부족하고, 외국인들이 여행하기에 불편하고, 단편적인 행사 위주의 정책으로 외국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 효과도 부족하다는 정도였다.
필자가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런 내용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간 여러 곳을 다니면서 느꼈던 점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생각보다 우리나라가 관광하기 편한 나라는 아닌 듯하다. 관광객을 여행지로 배달(Delivery)하는 체계 자체가 내국인들의 수요에 맞춰서만 설계돼 왔다. 가성비와 재미만 있다면 베트남의 산간 오지까지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실어 나를 정도로 억척스러운 우리 여행업계가 외국인 여행객들을 데려오는 것에는 맥을 못 춘다. 뭐가 재미있고 뭐가 의미 있는 경험인지는 관광객 스스로 평가해야 되는데 그 관광객이 한국에 오기도 어렵고, 와서도 이동하기가 어렵다면 입소문을 탈만한 좋은 평가도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언어 장벽, 외국인에겐 닫혀 있는 우리만의 대중교통 인프라, 익숙한 교통안내 앱의 부재, 식당 주문부터 거리 에티켓까지 외국인들에게 생소한 우리만의 사는 방식 등 아직까지 많은 진입장벽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이 입국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공항을 나서서, 목적지를 어떻게 정하고, 이동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어떻게 머물 곳을 찾고, 무엇을 소비할 지 그들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들을 해소해 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 생각보다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접근 난이도는 높은 편이다. 이 문제만 해소하려 해도 할 일이 적지 않다. 관광객들의 이동, 연결 인프라를 다시 설계하고, 관광객들의 동선을 최적화하기 위한 실시간 교통 안내/결제 시스템도 마련돼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보고 지나가면 끝나는 이벤트형 관광을 업그레이드해, 쉬고 머무르면서 휴양할 수 있는 체류형 관광이 대세가 되도록 할 필요도 있다. 관광산업, 그리고 함께 연결되는 요식업, 유통업 등 종사자들의 외국어 소통 능력과 문화 전달 능력을 키우기 위한 적극적인 교육훈련도 필요하다.
과거 공무원 시절 언론의 칼럼란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수많은 문제를 지적하고는 '앞으로 잘하라'며 한마디로 해법을 퉁치는 글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 역시 전례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트럼프 이후의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경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선 대박을 치는 한개의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새고 있는 누수를 막는 디테일한 배려가 필요하다. 우리 관광산업이 지금까지는 국가경제의 성장을 이끌어 주지는 못했지만, 당장 우려되는 위기로부터 내수경제를 지탱해 주는 역할만큼은 해줘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관광수지 적자를 반전시키기 위한 지혜와 노력이 무엇보다도 아쉬운 때다.
■ 박원주는 현재 중앙대 특임교수이자 삼성증권 사외이사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를 나와 행시 31회로 공직에 들어섰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정책과 에너지, 자원분야를 주로 담당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청와대 산업통상자원비서관으로, 문재인 정부에선 특허청장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을 자처하는 경제수석 당시엔 주로 기획재정부나 교수 출신이 선임돼 온 관행을 깨고 산업부 출신으로 처음으로 내정돼 화제였다. 그는 한국 경제와 산업, ESG에 대해 글을 풀어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