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을 앞두고 단행된 국내 대기업의 CEO·임원 인사는 한 해의 경영 방향을 넘어 한국 산업 전반이 처한 조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인사의 공통점은 새로운 비전이나 거창한 신사업 청사진보다 위기 관리와 책임 구조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데 있다.

고금리 장기화, 중국발 공급 과잉, 글로벌 수요 둔화, 강화되는 탈탄소 규제, 지정학 리스크까지 복합 변수가 동시에 작동하는 환경 속에서 기업들은 더 이상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지금의 사업 구조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부터 따진다. 산업 조건이 바뀌자 CEO에게 요구되는 역할 역시 달라졌다.

■ 구조조정이 상수로…‘정리의 리더십’ 전면에

석유화학·철강·건설 등 전통 중후장대 산업은 단기 경기 침체가 아니라 구조적 수익성 훼손이라는 공통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중국의 대규모 증설로 인한 공급 과잉, 강화되는 글로벌 환경 규제, 원가 변동성 확대는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운 변수들이다.

이런 환경에서 CEO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은 ‘확장 전략가’가 아니다. 산업 전반이 체력이 저하된 상황에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설비·자산을 정리하며 조직을 슬림화하는 관리자형 리더십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 복잡해진 밸류체인…확장보다 ‘묶기’ 전략

에너지·화학·제조·서비스·데이터 산업이 서로 맞물리며 기업의 사업 구조는 과거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계열사별로 성장하는 방식은 한계에 다다랐다. 내부 중복투자와 계열사 간 경쟁은 더 이상 효율이 아니라 비용이 된다.

글로벌 변동성이 커질수록 기업은 단기 의사결정 속도보다 조정 능력과 내부 효율을 우선시하게 된다. 분산된 사업을 하나의 전략 틀로 묶고 투자 우선순위를 조율하며 그룹 전체 리스크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해진 것이다.

■ 불확실성이 상수인 시대…공격보다 방어

안전·환경 규제, 지정학 리스크, 노사 변수, 금융시장 변동성은 더 이상 예외적 요인이 아니라 상수로 자리 잡았다. 일부 산업은 이 가운데 단 하나의 변수만 흔들려도 사업 전반이 영향을 받는다.

CEO의 핵심 임무는 혁신보다 위험 관리에 가깝다. 재무 안정성 유지, 사고 예방, 규제 대응, 운영 리스크 최소화가 경영의 우선순위로 올라섰다. 투자 확대나 신사업 추진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방어적 리더십의 부상은 기업이 보수적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 환경이 공격적인 전략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 오너의 재등장…책임의 무게가 달라졌다

이번 인사에서 또 다른 흐름은 책임 구조의 명확화다. 시장 변동성이 커지고 실적 가시성이 낮아질수록 최종 의사결정과 결과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위기 국면에서는 의사결정 속도와 책임의 명확성이 성과만큼 중요한 변수다. 일부 기업들이 오너일가를 경영 전면에 다시 세우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는 단순한 승계나 권한 확대라기보다 위기 국면에서 책임의 주체를 분명히 하려는 전략적 선택에 가깝다.

2026년 인사는 기업이 사람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산업 환경이 CEO의 역할을 바꿨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확장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정리·조정·방어·책임이 리더십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더 크게 키우는 CEO가 아니라 더 오래 버티고 더 적게 잃는 CEO, 즉 ‘지키는 리더십’이 평가 기준이 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