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9월 4일 전남 영암군 HD현대 삼호조선소에서 주요 생산 설비와 고위험 작업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HD현대)

명절 밥상은 늘 집안 자식 얘기로 달아오른다. “잘 크고 있나”, “앞으로는 뭘 하려나”하는 질문은 지금 재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조선·방산·석유화학·유통을 대표하는 대기업 후계자들은 이미 전면에 등장했지만, 각자의 무대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서로 다르다. 어떤 이는 눈에 띄는 성적을 냈고, 또 다른 이는 시작점에서 발걸음을 떼고 있다.

■ HD현대 정기선, LNG 대형 수주 성과…‘해양·ESG’ 과제

HD현대의 정기선 수석부회장은 ‘조선 3세대’ 가운데 가장 먼저 현장 지휘봉을 잡았다. LNG선 수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올리며 글로벌 업계의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남은 과제는 가볍지 않다. 탈탄소 규제 강화, 해양플랜트 부진, 디지털 조선소 전환 같은 과업은 단기간 성적표에 담기 어렵다.

무엇보다 지배구조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그룹 최대주주는 아버지 정몽준 이사장(26.6%)이고, 정 수석부회장의 지분은 6%대에 그친다. 권오갑 회장이 경영을 총괄하는 현 체제에서 차세대 오너로 자리매김하려면 성과 이상의 확실한 지분 기반이 필요하다.

■ 한화 김동관, 방산·태양광 호조…그러나 포트폴리오 쏠림 우려

한화의 김동관 부회장은 방산과 태양광에서 가장 또렷한 성적을 남겼다. 전쟁 특수로 방산 주문이 밀려들고, 미국 IRA로 태양광 투자가 불붙으면서 그룹 비금융 부문을 끌어올렸다. 김 부회장은 필리핀 조선소를 직접 챙기며 미국의 조선업 재건 프로젝트에도 발을 들였다.

하지만 한쪽에 치우친 포트폴리오가 리스크로 지적된다. 방산과 에너지는 국제정세와 정책 의존도가 높아 불확실성이 크다. 김승연 회장이 올해 지분을 세 아들에게 증여하며 승계 구도는 사실상 마무리됐지만 ‘성과의 지속성’과 ‘사업 다각화’라는 두 질문이 여전히 김 부회장을 따라다닌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8월 26일(현지시간)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화 필리조선소에서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 명명식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GS, 오너 4세들의 다자구도 전쟁

GS그룹은 장자승계 대신 가족 합의를 원칙으로 해온 특이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4세 승계 구도는 한 명의 독주가 아니라 다자 경쟁의 형태다. 허세홍 GS칼텍스 사장은 오너4세 중 가장 먼저 CEO에 올라 2022년 사상 최대 실적을 냈지만 이후 영업이익 급감으로 흔들리고 있다.

지분전에서도 경쟁이 치열하다. 허준홍 삼양통상 사장은 상속을 통해 지분을 5% 안팎으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크고, 허서홍 GS리테일 사장 역시 증여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결국 GS의 후계 경쟁은 “실적 vs 지분”의 긴 호흡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산, 위기 탈출 후 5세 경영수업 시작

두산은 128년 역사를 가진 만큼 가족경영의 전통이 뚜렷하다. 3세대가 형제경영을 이어왔고, 지금은 4세대 박정원 회장과 박지원 부회장이 그룹을 안정적으로 지휘하고 있다. 대규모 구조조정을 끝내고 채권단의 굴레를 벗어난 것도 4세 경영진의 성과다.

5세 승계는 이제 막 출발선에 섰다. 박정원 회장의 장남 박상수 수석은 신사업 전략팀에서, 박지원 부회장의 장남 박상우 파트장은 미국 연료전지 자회사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본격 승계까지는 시간이 남았지만 두산이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수소·반도체 소재·신재생 사업이 이들의 교재 역할을 할 전망이다.

■ 필요한 건 성적표가 아니라 ‘성과의 연속성’

재계는 지금 세대교체와 산업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는 드문 시기를 맞고 있다. LNG 호황, 방산 특수, 유통과 에너지 변동성은 후계자들에게 기회이자 압박이다. 재계 후계자들의 무대는 이미 열렸다. 성과와 리스크가 엇갈리지만, 공통된 과제는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이다. 지분·경영권 승계가 끝났다고 해서 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에너지 전환, 글로벌 규제, 시장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지금, 후계자들은 ‘성과의 연속성’을 입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