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경신문 뷰어스=김재범 기자]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완벽한 뮤즈가 돼 있었다. 신세대의 표상처럼 군림하던 김민희는 처음부터 주목 받는 여신이었다. 모델 출신으로 연기의 세계에 뛰어든 그는 텍스트로 설명 불가능한 이미지의 창조와 함께 ‘논란의 연기력’이란 이율배반의 주인공이 돼 버렸다. 불안정한 대사 전달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김민희가 갖고 있는 독특한 아우라 속에 파묻혀 버렸다. 사실 그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약점이 장점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대중의 착각이 아닌 오롯이 김민희 본인의 숨은 힘이었다. 그렇게 쌓여간 필모그래피 속에서 그는 잡지 속 생경한 미(美)의 여신으로 탈피를 이어갔다. 스스로도 몰랐고 대중들도 인식하지 못했다. 이제 김민희는 거장들이 가장 사랑하는 뮤즈가 됐다. 영화 ‘아가씨’ 속 김민희의 모습은 아직도 벗을 외피가 많다는 무언의 속삭임처럼 다가왔다.
칸 영화제에 다녀온 뒤 며칠이 지난 후 만난 김민희는 아직 시차적응에 조금은 애를 먹는 느낌이었다. ‘약간 피곤한 정도다’며 웃는 모습에서도 묘한 떨림이 전해왔다. 그 떨림이 어떤 의미인지는 인터뷰가 거의 끝날 때 쯤 느낄 수 있었다. 우선 그는 ‘말이 적기로 유명한’ 여배우다. 인터뷰이로서는 사실 결코 달갑지 않은 유형의 여배우다. 하지만 말이 적다는 의미는 그만큼 거르고 걸러서 남겨진 정확한 말만 토해낸단 것도 된다.
“하하하. 제가 확실하게 말이 좀 적은 편이긴 해요. 글쎄요(웃음) 많이 할 말도 없고. 성격적인 면인가? 사실 되게 외향적이고 활달하고 그래요. 그런데 필요한 지점에선 제가 할 말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란 생각을 하고 머릿속을 정리하는 느낌은 좀 있죠. 그런 부분이 연기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구요 내성적이고 낯가리는 그런 건 아니에요(웃음)”
그의 말처럼 ‘아가씨’ 속 ‘히데코’(김민희)는 극도의 정제된 전달만으로 남자들을 혹은 여성(숙희:김태리)을 뒤흔드는 마력을 발산했다. 텍스트로는 설명 불가능한 지점이다. 연기만드로도 사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민희란 배우의 껍질을 타고 전달될 때 그것은 체험이란 느낌이 된다.
“너무 과찬이세요. 하하하. 그저 미술 의상 분장 등 각 파트의 최고 전문가분 들이 만들어 놓은 밥상 위에 숟가락 얹은 것 뿐인데요(웃음). 영화 속 히데코의 외모적인 느낌이 잘 살아나면서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어진 것 같아요. 물론 첫 번째는 탄탄한 시나리오였죠. 반전이 거듭되는 탓에 긴장감을 놓칠 수도 없었고. 그 안에서 숨쉬는 히데코의 결이 너무 다채로워서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강하게 느껴졌었죠.”
김민희의 설명대로 ‘아가씨’의 히데코는 다채로웠다. 전체가 3부로 구성된 ‘아가씨’에서 주인공 ‘히데코’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진폭이 컸다. 1부가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살아가는 잘 가꿔진 화초라면 2부는 반전의 이미지가 숨은 모습을 드러낸다. 이어진 3부는 더욱 거대한 비밀을 밝혀내며 모든 스토리의 방점을 찍는다.
영화 '아가씨' 속 김민희
“이번 작품을 꼭 해보고 싶은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히데코의 변화 폭이 엄청나게 크다는 점이었어요. 정말 흥미로운 지점이었죠. 온전히 배우로서 ‘히데코’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꼈던 부분이에요. 사실 연기적으로 히데코의 그런 변화를 표현하는 게 힘이 드는게 맞아요. 그런데 오히려 정말 재미를 느꼈죠. 감정의 변화가 크지만 반대로 히데코란 인물 자체가 보편성을 띤 케이스가 아니다 보니 정답이 없는 거죠. 제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상상을 해봤죠. 이렇게 해도 되겠다. 아니야 여기선 이래도 되겠다 등등. 굉장히 다양한 시도가 가능했던 배역이에요.”
극중 김민희의 매력이 극대화되는 부분은 기모노를 입고 소설을 낭독하는 지하 서재 장면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김민희의 얼굴과 극장 안에 울려 퍼지는 일본어 대사는 어떤 에로틱함의 극치를 넘어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아가씨’ 속 최고의 19금을 꼽자면 익히 알려진 두 여배우의 농도 짙은 노출 연기가 아니다. 바로 김민희가 나지막하게 읽어 나가는 소설 낭독 장면이다.
“하하하. 약간의 스포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그 읽는 소설이 정말 야한 소설이잖아요. 되게 민망했어요. 사실 노출 장면보다 그 소설 읽을 때가 더 민망했죠. 더욱이 구연동화를 하듯 소설을 읽으면서 연기를 해야 하잖아요. 하하하. 아휴 정말. 다른 지점으로 봐도 되게 묘한 장면이긴 하죠. 책을 읽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여러 인물을 연기하잖아요. 목소리 톤도 바꾸면서. 참고 그때의 일본어 목소리는 제 목소리가 맞답니다(웃음)”
물론 ‘아가씨’가 이처럼 최고로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는 상상 이상의 노출신 때문일 것이다. 특히 김민희의 극중 상대역인 ‘하녀’ 배역 오디션에서 박찬욱 감독이 ‘노출 수위 최고 협의 불가’란 가이드라인을 설정했단 내용이 보도된 뒤 더욱 관심을 뜨거워졌다. 가녀린 두 여배우가 최고 노출 수위 속에서 펼치는 장면이다. 그것도 국내 영화에선 거의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레즈비언 베드신이다.
“(웃음) 많이 관심들을 가져주시는 부분이죠. 당연히 관심이 가는게 맞는 거죠. 우선 전 시나리오 읽을 때 원작이 있단 말을 들었고 그리고 원작을 읽어볼까 하다가 안 읽었어요. 원작을 안봐도 될 정도로 시나리오에 정확하게 표현이 돼 있었구요. 숙희와 히데코의 베드신은 100% 콘티가 있었고 그것에 정확하게 따라갔어요. 동성애? 특별하다고는 생각 안했어요. 스토리의 흐름상 너무 당연한 장면이었고. 내가 연기를 할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거처럼 관객들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게 더 중요했죠.”
물론 치밀하고 숙련되고 이젠 거장이라 불리는 박찬욱 감독의 연출이고, 여기에 100% 완벽한 콘티가 있었다고 한들 베드신의 육체적 체감은 배우들에겐 살인적이다. 일부 배우들은 ‘베드신’을 ‘액션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 배우가 날 것 그대로 뒤엉켜 몸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기에 상상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고.
영화 '아가씨' 속 김민희
“너무 힘들었죠. 아휴 진짜 저도 힘들고 태리도 힘들고 진짜 힘들었어요. 그건 힘들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에요. 하하하. 베드신도 힘들었지만 감정을 교류하는 신도 쉽지는 않았어요. 숙희(김태리)와 제가 친밀한 감정에서 시작해서 그 후 미묘하게 변해가는 지점을 관객 분들이 납득하셔야 하잖아요. 흐름을 따라가면 분명히 느껴지는 감정인데 자칫 힘을 빼면 관객들이 이해하기 힘들수도 있고. 그 긴장을 잡고 가는 게 제일 힘이 들었죠.”
‘아가씨’가 개봉하면 남은 홍보 일정을 소화하고 당분간은 좀 쉬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김민희다. 칸 영화제 참석 당시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홍상수 감독의 신작도 촬영을 하고 왔다. 홍 감독의 뮤즈로 자리한 지 오래인 그는 이제 박찬욱 감독의 러브콜에도 응하면서 거장들이 사랑한 그녀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제가 잘 맞추는 편이에요. 하하하. 고집 부리지 않고(웃음). 제가 고집을 피울 위치도 아니잖아요. 하하하. 유연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좋은 작품 만나고 또 그렇게 흘러가고. 왔다 가는 인연처럼요. ‘아가씨’도 이젠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고. 잘 가라고 해야죠. 고마웠다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