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경신문 뷰어스=김재범 기자] 이제는 좀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아니 사실 이미 많이 벗어났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이름 앞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수식어 하나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있다. 누군가는 얻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을 한다. 하지만 어떤 누군가는 그것을 때어내기 위해 자신을 놔버리며 색(色)을 빼내려 한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색’이라면 이 배우에게 그것은 짙은 무채색의 무게감이 되버린 지 오래다. 그것이 설사 훈장에서 고철로 바뀌었다고 해도 말이다. 단순하게 느껴지는 무게를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해온 것이 꼭 ‘수십 년 장인’의 노력을 한 순간에 얻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쑥스러운 겸손함이 먼저일까.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김명민은 ‘연기 본좌’란 수식어를 이젠 지우고 싶단다.
영화 개봉 전 만난 김명민은 어느 때처럼 정확했다. 그는 유명한 재주가 하나 있다. 다른 선배 혹은 후배 배우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는 아주 조금은 다른 그것이 있다. 기억력이다. 현장에서 가장 막내 스태프의 이름까지 모두 외워 불러주는 정말 사소한 지점을 배푼다. ‘배푼다’는 의미도 사실은 좀 거창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날도 거의 1년 만에 만난 기자의 이름을 먼저 언급해줬다.
“사람이 단순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이름 듣는 게 얼마나 될까요. 특히 열악한 현장에서 막내 스태프들은 다른 이름으로 항상 불려요. ‘야!’ 이게 거의 대부분이죠. 물론 안 그런 현장도 많지만. 배려라고 생각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그 이름 한 번에 그 친구들은 자신도 모르는 힘을 낼 수도 있어요. 저도 예전 무명 시절에 느꼈던 부분이구요. 그리고 이름 불러주고 또 들으면 얼마나 기분 좋아요. ‘○○야 밥먹었어?’ ‘○○야 수고!’ 좋잖아요(웃음)”
이번 영화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편안하고 안락한 현장이 어디 있겠는가. ‘특별수사’ 현장도 그 어떤 작품과 다름없이 치열하고 때로는 날카로웠다. 그런 속에서도 김명민은 결코 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배우 중 한 명이다. 주연 배우인 자신이 자칫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질 경우 전체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모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맞아요. 제가 주연 배우라고 목에 힘줄 필요도 없구요. 더욱이 이번 현장에는 상호형, 동일형이 함께 해서 정말 든든했죠. 제가 제일 먼저 캐스팅 됐는데 나중에 이 형들이 캐스팅됐단 소식을 접하면서 정말 놀랐어요. ‘어떻게 이런 조합이 가능하지’ ‘저 안에서 내가 가능할까’ ‘난 정말 복 받았다’란 생각이 들 정도였죠. 이번에는 거의 두 분한테 업혀간 케이스에요. 진짜에요. 하하하.”
특히 이번 영화에서 그는 대선배 ‘김영애’와 날 선 대립각을 펼치는 법률 브로커 최필재를 연기했다. 상대역인 김영애는 재벌가의 안주인이자 실질적인 지배자 ‘여사님’으로 출연한다. 이름도 없는 김영애의 캐릭터 존재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찰떡궁합을 자랑한 김상호 성동일과의 연기 외에도 그는 김영애의 존재감에 ‘진짜 대박’이라며 양손의 엄지를 추켜세웠다.
영화 '특별수사' 중 한 장면
“데뷔 45년에 접어든 엄청난 선배님이세요. 더욱이 ‘여사님’ 역할은 그냥 ‘악’이에요. 처음에는 ‘대체 누가할까’ 했는데 김영애 선생님이 하신다는 말을 듣고 너무 놀랐죠. 정말 소녀 같이 섬세하고 조용하신 분이에요. 그런 분이 ‘여사님을?’ 이런 느낌이었죠. 그런데 현장에서 어땠는지 아세요? 슛만 들어가면 눈빛과 목소리가 다른 사람이 되세요. 정말 옆에서 숨도 못 쉴 정도의 위압감이랄까. 진짜 베테랑을 만나면 정말 짜릿함을 넘어 소름이 끼칠 때가 있어요. 이번에 저도 그걸 느꼈죠. 배우에게 그런 경험은 복이에요. 복(웃음)”
하지만 이번 영화가 무겁고 힘든 스타일의 범죄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스토리이지만 의외로 경쾌하고 밝은 톤을 유지한다. 여기에 김명민마저 자신의 이미지 변신 대표작이 된 ‘조선명탐정’의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코미디에 방점을 찍은 ‘조선명탐정’과 달리 이번 ‘특별수사’는 ‘힘을 뺀’ 스타일의 연기에만 집중했을 뿐이다.
“아마도 직업이 아닌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제 연기 스타일이 좀 보여지 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법률브로커’란 직업 자체가 돋보여지면 단순한 범죄물로 흘러갈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필재’란 인물의 달라지는 감정이 관객들에게 전달돼야 하찮아요. 필재에 대한 궁금증을 좀 더 키웠어요. 자세한 얘기는 예비 관객 분들에 대한 재미로 남겨 두는 게 좋겠죠(웃음) 조금 설명을 보태자면 ‘필재’는 그저 환경 때문에 속물이 된 인물이에요. 감정의 굴곡을 보여주기 보단 사실 좀 스타일에 맞춰다고 할까요(웃음)”
‘조선명탐정’ 이후 이번 ‘특별수사’ 역시 코미디 요소가 강한 지점이 많다. 물론 이번 영화에선 그 중심에 김명민이 서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분명 좀 다르게 보이고 달라 보인다. 진중하고 무거운 연기의 톤을 유지하던 김명민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과 시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이 싫든 좋든 그는 그렇게 보이고 있었다.
“그동안 뭐랄까. 영웅적인 면이나 딱 부러지는 성격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역할을 주로 연기해 왔어요. 그게 영향을 끼쳤는지 절 되게 딱딱하고 어려운 사람으로 주변에서 많이 보세요. 하하하. 물론 그런 이미지에 대한 덕도 정말 많이 봤죠. 글쎄요. 예전부터 한 생각이지만 나이들어서 편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코미디는 사실 연륜과 세월이 쌓이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연기거든요. 그저 이미지를 벗기 위한 선택이라기 보단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저만의 선택이라고 보시면 될 거 같아요.”
그의 이번 선택은 의외로 강렬한 잔상을 남길 듯하다. 그를 포함한 출연 배우들 모두가 언론시사회를 통해 완성된 작품을 처음 보게 됐다. 배우들은 입을 모아 ‘시나리오보다 훨씬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며 만족해했다. 주변의 평들도 꽤 좋은 느낌이다. 특별하게 흥행 성적에서 ‘대박’을 터트린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조금 욕심을 내볼 만도 했다.
영화 '특별수사' 중 한 장면
“욕심나죠(웃음). 잘 됐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참 뭐랄까. 이런 얘기들이 자꾸만 영화로 나오게 되는 현실도 참 아이러니한 거 같아요. 사실 안 좋은 얘기잖아요. 현실이 답답하니 영화로라도 풀어보자. 뭐 이런 느낌이랄까요. 사실 촬영 초반엔 이게 실제 모티브라는 사실을 감독님이 말씀을 안 해주셨어요. 연기를 하는 데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자신 있는건 우리 영화가 시원함, 통쾌함을 준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이 나올 수 있단 점이에요(웃음)”
차기작은 배우 변요한과 함께 영화 ‘하루’로 결정됐다. 박훈정 감독의 신작 ‘VIP’ 출연도 논의 중이다. 올해 안으로 박정우 감독의 재난영화 ‘판도라’ 촬영도 남아 있다. 세 작품 모두 각기 다른 색깔과 톤을 갖고 있다. 김명민의 선택과 방향은 팬들에게 묘한 설렘을 안겨주는 힘이 있다.
“아마도 작품 선택 기준을 물으시는 것 같은데. 특별한 기준은 없어요. 단 확실한 것 하나는 있죠. 남이 해도 되고 제가 해도 되는 작품은 절대 안해요. 물론 그 말이 꼭 나야만 한다는 얘기도 아니에요. 나를 필요로 하는 영화를 고르는 게 우선이에요. 그런 작품이라면 전 지금이라도 달려갑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