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화 '밤의 피크닉')
모두가 거나하게 술이 취한 자리였다. 자리는 무르익을 대로 익었고, 이미 술이 나를 마시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즈음이었다. 남자와 여자에 관한 온갖 얘기가 오갔고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
“나는 결혼한 후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겠다! 손!”
남자 셋에 여자 하나. 나올 법한 질문이기도 했다. 조금 주저하는 듯한 눈빛이 오가더니 “야야, 솔직히 어떻게 한 사람만 보고 사냐.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 “의리로는 사는데 안 들키게 하련다”라는 등 격의없는 속내가 터져나왔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말했다.
“나는 외도 안해, 절대.”
순간, ‘이런 의리없는 놈을 봤나’라는 두 남자의 시선이 꽂혔다.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배다른 형제가 있어. 그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내내 원망하고 살았고 나는 생각했지. 남자는 함부로 몸을 쓰면 안된다. 그럴 바엔 비혼주의자로 살아, 이놈들아”
“만나는 봤어?” 쿨한 어투 때문인지 누가 참 돌직구를 던진다. 이번에도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같이 살기도 했다, 야. 걔네 엄마가 무턱대고 보내서. 뭐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긴 했는데 그래서인가? 한번씩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내가 이복형제끼리 잘 사는 고전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어머니가 치를 떠니까 말도 못 꺼내긴 하는데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긴 하다. 내가 혼자잖냐. 동생이 있다는 거, 어떤 건가 싶어서 그런가? 아 몰라.”
그날 깜짝 커밍아웃은 그렇게 끝났고 음담패설로 이어졌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오래 전 읽은 책 속 주인공들이 그에게 겹쳐졌다. 가족의 금기에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는 심정은 어떨까. 오지랖 넓게도 조금이나마 위로를 건네고 싶어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 위에 작은 책 한권을 올려뒀다.
(사진='밤의 피크닉' 책표지)
그에게 건넨 온다 리쿠‘밤의 피크닉’은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걷는 10대의 끝에 선 고교생들의 이야기다. 저명한 추리작가이기도 한 온다 리쿠는 노스텔지어의 여왕이라고도 불린다. 그 수식어답게 온다 리쿠는‘밤의 피크닉’을 통해 독자의 추억을 일깨우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묘하게 팽팽한 긴장감과 수수께끼를 담아낸다.
졸업여행처럼 밤을 새워 80km를 걷는 고교생활의 마지막 대이벤트 ‘야간보행제’에 참가한 니시와키 도오루와 고다 다카코는 각자 가장 친한 친구를 길동무 삼아 길을 나선다. 도오루와 다카코는 철저히 서로를 외면하는 데 이 때문에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학내에 파다하게 되고 도오루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도오루와 다카코는 사실 이복남매이기 때문. 이혼한 다카코의 어머니가 도오루 아버지와 잠시 바람피워 낳은 자식이 다카코였고 이 때문에 서로의 관계를 아는 두 사람은 항상 서로를 피해 다녔다. 죽을 때까지 마주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3학년이 되면서 한 반이 되어버린 두 사람. 도오루는 항상 적대감에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다카코를 바라봤다. 반대로 다카코는 보행제의 밤 12시가 넘기 전에 도오루에게 한 마디라도 먼저 건네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다가간다.
잔잔한 이야기지만 온다 리쿠는 힘 있는 스토리텔링과 치밀하고 섬세한 인물묘사로 독자가 도오루, 다카코의 심적 상태를 함께 느낄 수 있게 한다. 또 고교시절의 추억과 세상 전부인 것만 같았던 작았던 마음, 영원할 것 같았던 우정까지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책은 쉽게 읽히지만 끊어 읽기는 좀 아쉬운 작품이다. 넉넉한 시간에 차분하게 향수와 추억과 글자 위를 걷는 느낌을 만끽해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