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tvN)
[뷰어스=손예지 기자] 드라마는 유의미한 장면들로 이뤄진다. 한 장면 속에 인물의 삶을 보여주는 상황,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대사들이 담긴다. 작품, 그리고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들여다볼만 한 장면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 장면 정보
작품 제목: tvN ‘무법 변호사’
방송 일자: 2018년 6월 17일 (12회)
상황 설명: 하재이(서예지)는 차문숙(이혜영)의 마사지사로 위장 중인 노현주(백현주)가 18년 전 실종됐던 자신의 엄마임을 알았다. 재이는 모든 사실을 알고도 자신을 속인 봉상필(이준기)에게 실망하고, 연락이 닿지 않는 엄마를 찾기 위해 직접 나섰다.
■ 장면 포착
문숙의 사무실, 재이가 들어선다
문숙: “재이야”
재이: “우리 엄마 어딨어?”
문숙: “여기서 너희 엄마를 찾으면 어떡해? 너희 엄마는 18년 전에 사라졌잖아”
재이: “차문숙, 말해. 우리 엄마 어디로 데려갔어?”
문숙: “하… 가족이라는 게 말이야. 참,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너나 네 엄마처럼 말이야”
재이: “뭐?”
문숙: “그래, 나도 잘 알지. 그래서 더 이상 가족을 만들지 않는 거야. 가족이라는 게 평생 떼어낼 수 없는 약점이거든. 지금 너처럼”
재이: “미친 소리 하지 마. 차문숙, 당신은 절대 가족이 뭔지 몰라. 우리 엄마 어딨어”
(사진=tvN)
■ 이 장면, 왜?
‘무법 변호사’는 봉상필이라는 남자가 죽은 엄마의 복수를 위해 변호사가 되어 법으로 악인들을 처단하는 이야기다. 남자 주인공을 원톱으로 내세워 그의 성장기를 좇는 영웅 서사의 전형을 따른 듯 보인다. 그러나 ‘무법 변호사’는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이 남자 주인공에 못지않다는 점에서 기존의 영웅 이야기와는 크게 다르다. 이 드라마의 여자들은 매우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다.
우선 재이는 근래 장르물에서 보기 드문 여자 주인공이다. 초능력이나 신(神)기도 없고, 남자 주인공에게 의지하지도 않는다. 아주 평범한, 그런 한편 뜨거운 정의감을 지닌 변호사 재이는 자신의 능력껏 사건을 해결한다. 상필과 손을 잡은 뒤에도 그를 돕는 데만 그치지 않고, 자신 역시 상필의 맹목적인 도움이나 보호를 바라지 않는다. 상필이 독단적으로 행동할 때면, 설사 그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았을지라도 “뭐든 나랑 같이하는 거 아니었냐”고 따지는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극 중 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기성 시의 숨은 권력자 문숙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옛말을 떠오르게 한다. 기성 지역 법조 명문가의 고명딸인 문숙은 아버지를 따라 기성지법 부장판사를 지내고 있으며, 시민들에게는 ‘마더 테레사’로 통한다. 이는 모두 문숙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의 민낯은 누구보다 추악하고 비열하다. 제 눈에 거슬리는 이는 반드시 짓밟아주는데, 절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 없다. 지역 검사장·은행장부터 깡패 두목까지, 권력을 지닌 남자들 위에서 군림하는 악인 중의 악인이다.
그렇기에 12회 재이와 문숙의 대립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 재이는 18년 만에 재회한 엄마가 상필의 복수극에 이용되고 있음을 알게 된 뒤 곧바로 문숙을 찾아갔다. 상필에게 답을 구하거나 기다리는 대신, 정면 돌파를 택한 것이다. 문숙은 그런 재이를 비웃고 냉대했다. 그는 가족을 “평생 떼어낼 수 없는 약점”이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이는 문숙이 여태 아무 죄의식 없이 사람의 목숨을 갖고 놀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스스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만 살았기에 가족이나 친구 등 진심을 나눌 관계를 맺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소중함이나 가치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에 재이는 “당신은 절대, 가족이 뭔지 모른다”고 일침을 가했다. 재이는 이어 “우리 엄마 어딨냐. 말하라”고 악을 썼고, 문숙은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극 중 재이와 문숙은 ‘무법 변호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관계이기도 하다. 문숙은 과거 재이의 엄마이자 멘토이기를 자처했다. 재이 역시 극 초반까지 문숙을 신뢰했고 오히려 그를 의심하는 상필을 믿지 못했으나, 진실이 드러나면서 문숙을 향한 배신감과 분노가 커졌다. 반면 문숙은 진실을 알게 된 재이를 ‘하룻강아지’ 쯤으로 여겼으나, 재이가 상필과의 공조로 점차 제 목을 옭아매 오자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두 인물은, 돌이킬 수 없이 먼 양극단으로 떨어지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배우들의 연기로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특히 12회 대립 장면에서 이혜영과 서예지의 존재감이 빛났다. 길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두 배우의 열연이 빚어낸 여운이 길게 남았다. 이혜영의 눈빛에는 언제나 상대를 깔보고 조소하는 문숙이 그대로 녹아 있었으며, 이에 기죽지 않고 맞서는 서예지의 모습도 감탄을 자아냈다. 서예지 특유의 낮은 목소리는 캐릭터의 감정을 더욱 와 닿게 했고,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경멸과 분노를 담은 눈빛 연기는 극에 더욱 몰입하게 했다.
거악 소탕을 목표로 한 복수극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재이가 문숙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재이와 문숙의 대립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무법변호사’ 12회는 닐슨코리아 제공 유료플랫폼 전국 가구 기준 시청률 6.7%를 기록, 케이블·종합편성채널을 포함해 동 시간대 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