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짧은 머리, 여자는 긴 머리와 같은 인식처럼, 우리 사회엔 남녀를 구분 짓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다. 남녀의 성질을 구분 짓고 교육한다. 긴 머리카락, 화장, 치마 등이 여성의 전유물이 된 것처럼 말이다. 최근 들어 남녀를 구분 짓던 전유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젠더리스’(genderless)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한 마디로 성별이 없는, 즉 성별의 구분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남성이 화장을 하고, 여성이 군화를 신는 것이 그 예다. 몇 년 사이 뷰티 업계부터 미디어까지 이 같은 변화가 확대되고 있다. 달라지고 있는 현 사회의 ‘젠더’ 정의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사진=연합뉴스)
[뷰어스=한수진 기자] 직장인 박상학(28.서울) 씨는 대학 때부터 외출할 때면 늘 기초 메이크업을 해왔다. 외모 콤플렉스가 있던 탓도 있지만 멋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도 함께 했기 때문이다.
박 씨는 “밖에 나갈 때 비비크림과 립밤을 바르고 눈썹 아이브로우를 그린다. 처음 바를 땐 창피했는데 사회적으로 화장하는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보니까 이젠 좀 당당해졌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남성의 미에 대한 기준이 변화하고 있다. 그저 스킨을 바르는 것이 화장의 전부였던 남성들이 비비크림을 바르고 눈썹도 그리기 시작했다. 달라진 소비문화에 화장품 업계도 남성을 타깃으로 한 마케팅에 주력하는 분위기다.
수년전부터 해외에선 뷰티, 패션업계의 화두로 젠더리스가 떠올랐다. 성과 나이의 파괴를 주 특성으로 하는 트렌드다. 위의 사례처럼 남성이 화장을 하거나 치마를 입고, 여성이 풍이 큰 옷을 입는 것이 젠더리스의 특징이다.
패션과 뷰티 업계에서 시작되어 세계적으로 트렌드를 이끌던 젠더리스는 이제 사회, 문화로까지 확장됐다. 일본과 영국 등에서 남학생에게 치마 교복을 입을 수 있도록 허용했고, 뉴욕과 런던에선 성(性) 중립 화장실을 만들어 성별의 구분을 짓지 않게 했다. 젠더리스를 패션, 뷰티에만 한정 지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특히나 패션업계에선 젠더를 구별하는 것조차 유행에 뒤쳐진 행위라 여기는 추세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젠더개념이 점점 사회적으로도 흐려지고 있다. 룩에서도 젠더를 나누는 게 약간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며 “90년대에도 젠더리스룩은 있었다. 아르마니 같은 남성 브랜드에서 여성들에게 수트를 입히기도 했다. 이제는 여성에게 남성복을 권하는 것이 아닌 남성에게도 여성의 옷을 권하고 있다. 남성의 것만이 멋있는 게 아닌 남녀 모두의 것들이 멋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라카 홈페이지)
■ 남성의 화장품 구매율 높아져..예뻐지는 남자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색조화장품마저 남성의 구매율이 꾸준히 상승 중이다. 지난달 ‘메이크업에 대한 오랜 관성을 깬다’는 목표로 젠더 뉴트럴 메이크업 브랜드 라카(LAKA)가 론칭됐다. 라카는 모든 출시 화장품에 성별의 구분을 짓지 않는 제품을 선보였다. 립스틱도 여성모델뿐 아니라 남성모델도 동등하게 제품을 시연해 홍보한다.
라카는 성 중립을 모토로 하고 있는 만큼 전 제품 디자인부터 립스틱 컬러까지 과하지 않다. 아직 색조 화장을 꺼리는 남성들의 접근성을 넓히기 위해서다. 현재 라카 전체 매출의 20~30%를 남성 구매자가 차지하고 있을 만큼 초반 반응이 좋은 상황이다.
또한 지난달 G마켓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남성 소비자가 백화점 명품화장품 중 여성용 스킨케어 세트를 구매한 건수가 전년 동기 대비 2배 이상 늘어 122%나 증가했다. 파운데이션 구매 건수는 전년 대비 16%나 상승했다.
학생 김두선 씨(25.인천)는 “지난해 연인이 비비크림을 선물해 처음 발라봤다. 처음엔 거부감이 있었는데 적응하고 나니 바른 후의 모습이 더 멋있는 것 같아서 지금은 직접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주위에도 비비크림 바르는 친구들도 꽤 있어서 부끄럽다거나 하지 않다”고 말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여러 디자이너들이 원피스를 남자 모델에게 입혔다. 단 여성이 남성적인 옷을 입는 건 되게 쿨하고 시크하다고 느껴지는 반면 아직까지 남성이 여성적인 옷을 입을 때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그럼에도 유명 남자연예인들이 젠더리스 룩을 입기 시작하면서 생각의 변화가 이뤄지고 있긴 하다”며 “패션으로 성의 규칙을 깨버리는 흐름은 전세계적인 추세다. 덕분에 남자도 와이드 팬츠를 입을 수 있어서 좋다. 패션은 단지 눈으로 보이는 것뿐이지 삶의 방식이 이러한 흐름을 바꾸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시와 시의 한 중학교가 도입하기로 한 젠더리스 교복(사진=연합뉴스, NHK 캡처)
■ 일본, 남학생에게 치마 입을 권리를 주다
일본의 한 중학교에서 올해 젠더리스 교복을 도입했다. 지바(千葉) 현 가시와(柏)시에 있는 이 중학교에선 여자는 바지를, 남자는 치마를 입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일본뿐이 아니다. 영국은 이미 지난해부터 성별 중립 교복을 도입해 100개가 넘는 학교에 젠더리스 교복을 도입했다.
특히 영국 남동부 이스트 서식스 주에 있는 한 중학교에선 치마 교복을 없앴다. 본 학교의 교장은 “교복은 모든 학생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본래 일본의 학생복은 짧은 스탠드 컬러의 남자 학생복과 세일러복 모양의 여자 학생복으로 통일돼 있다. 하지만 해당 중학교에서 젠더리스 교복을 처음 도입하며 성별과 관계없이 학생이 원하는 스타일의 교복을 고를 수 있게 했다.
젠더리스 교복이 생기게 된 이유는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학생들 때문이다. 실제 성(性)과 마음으로 여기는 성별이 다른 데 강제로 치마를 입거나 바지를 입어야 하는 상황이 학생에게 큰 고통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이에 이 중학교는 입학예정 아동과 학부모 등의 속한 검토위원회와 논의한 끝에 젠더리스 교복을 도입했다.
(사진=SBS 방송화면)
■ 국내서도 성 중립 화장실 도입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성공회대학교에서도 성 중립 화장실 도입에 나선다. 현재 국내에 성 중립 화장실은 인권재단 사람, 한국다양성연구소 등 일부 단체에서만 설치돼 있는 상황이다. 대학에서는 성공회대가 처음이다. 성공회대는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1인 화장실, 남녀 구분 없는 성 중립 화장실을 도입한다. 성 중립 화장실은 성별 구분이 없어 성 소수자는 물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성공회대 측은 “올해 2학기 정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성공회대학교 재학생인 천세울 씨(신문방송학.4학년)는 “성 중립 화장실은 지난해 학생회장 공약에서 나왔다. 이후 수업 시간에서 성 중립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갔다. 일방적으로 학교 측에서 통보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닌 지속적인 이야기를 통해 학생들을 이해시켰다. 동의하고 있는 학생은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 있다. 나 역시 처음에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주변 학우들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이해했다. 지금 내 주위 학생들 사이에선 필요한 변화라고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성 중립 화장실이 보편화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지난 2015년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성 중립 화장실을 설치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선 이 같은 변화가 성급하다는 지적이 주를 잇고 있다. 화장실 등의 몰래카메라 범죄 발생 건수가 지난 2012년 2400건에서 2017년 6470건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를 떠나 성 중립 화장실이 범죄에 이용 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기에 근본적인 성(性) 인식에 대한 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젠더리스 역시 성 인식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인간을 성적 분류가 아닌 인간이라는 하나의 타이틀로 자유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만들어 근본적 원인을 뿌리뽑자는 거다.
이미 마케팅에서도 남녀를 구분한 이분법적 경영활동은 효력을 잃었다. 영국의 한 유통업체는 어린이용 과학 세트에 남자용이라는 표기했다가 비난을 받은 사례가 있다. 2013년 인텔리전스그룹이 14~34세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선 60%가 '남녀 구분이 사라지고 있다'고 답했다.
연세대 이동귀 심리학과 교수는 “성(性)을 특정 하는 순간 차별과 연관된다. 여성이라는 것, 혹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인식이 잠재적으로 발생한다. 젠더를 강조하게 되면 자체 내에서 공고화된 차별에서 분류가 되지 않는다. 비단 여성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해당한다. 여성과 남성으로 지칭하기 보단 인간이란 하나의 개념으로 보편타당한 권리를 보장받는 흐름과 맞물려서 젠더리스와 같은 흐름이 생기는 거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