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짧은 머리, 여자는 긴 머리와 같은 인식처럼, 우리 사회엔 남녀를 구분 짓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다. 남녀의 성질을 구분 짓고 교육한다. 긴 머리카락, 화장, 치마 등이 여성의 전유물이 된 것처럼 말이다. 최근 들어 남녀를 구분 짓던 전유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젠더리스’(genderless)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한 마디로 성별이 없는, 즉 성별의 구분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남성이 화장을 하고, 여성이 군화를 신는 것이 그 예다. 몇 년 사이 뷰티 업계부터 미디어까지 이 같은 변화가 확대되고 있다. 달라지고 있는 현 사회의 ‘젠더’ 정의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최아라, 김민석(사진=JTBC 청춘시대 공식 인스타그램)
[뷰어스=한수진 기자] 남성의 부엌 출입이 금기시되고 부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여성의 모습은 요즘 시대에선 '말도 안되는 풍경'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단어가 일상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만 봐도 그렇다.
여성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JTBC 드라마 '청춘시대2'에서 조은을 연기한 모델 겸 배우 최아라는 키가 무려 178센티다. 특히 최아라는 극중에서 짧은 커트머리에 풍이 큰 젠더리스 룩을 즐겨 입는다. 남성의 모습에 가까운 외관이다. 하지만 그는 극중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지 않는다.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고, 애인도 사귄다. 외관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일상에 어우러진다. 사랑 받는 여자는 치마를 입고 머리도 길어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형식이었다.
특히나 젠더리스 현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분야는 가요계다. 에이스라는 보이그룹은 핫팬츠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핫팬츠는 걸그룹을 상징하는 무대의상이기도 하다. 샤이니 태민도 지난해 발매한 솔로앨범에서 ‘젠더리스’와 뗄 수 없는 콘셉트를 선보였다. 이 외에도 빅뱅 지드래곤과 태양, 샤이니 키, 배우 강동원, 진서연 등의 연예인들이 공식석상에 젠더리스 룩을 입고 등장했다.
(사진=엠넷 방송화면)
■ ‘프로듀스 101’ 속 달라진 남성의 모습
지난해 방송된 엠넷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듀스 101’ 시즌2는 남자 편으로 꾸며져 방송됐다. 101명의 아이돌 지망생들이 등장해 춤, 노래 실력을 겨루고 외모와 같은 매력들을 뽐냈다. 가히 신드롬적인 반응을 얻었고, 해당 방송으로 스타가 된 이들이 수두룩했다. 리얼리티 형식으로 진행된 해당 방송은 연습생들의 연습 과정뿐 아니라 일상 모습까지 함께 공개했다.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순위 발표를 앞두고 화장을 고치는 연습생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각기 파운데이션쿠션을 손에 쥐고 얼굴에 찍어 발랐다. 남성적인 캐릭터를 유지했던 플레디스 강동호(뉴이스트 백호) 연습생마저 함께 했다. 어떤 연습생은 입술 틴트를 과하게 발라 제작진에게 톤 다운을 권유받기도 했다.
그 어떤 연습생도 화장에 대해 낯선 시선을 보내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쿠션을 빌려 쓰기 바빴다. 숙소에선 팩하는 모습도 자주 등장했다. 물론 PPL인 점을 감안한다면 다소 인위적인 풍경이었지만 시청자 반응은 좋았다. 이후 출연 연습생들 일부는 화장품 광고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사진=태민 '무브' 뮤직비디오 스틸 컷)
■ 샤이니 태민의 ‘무브’, 여성적 섹시함을 더하다
샤이니 태민은 지난해 솔로 정규 2집 앨범 ‘무브’(MOVE)를 발매했다. 동명의 타이틀곡 ‘무브’는 리드미컬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의 PB 알앤비 장르의 노래다. 여기에 곁들여지는 태민의 목소리는 끈적하고 농염하다. 콘셉트와 퍼포먼스에서도 흐름을 같이 한다.
태민은 ‘무브’ 퍼포먼스를 통해 기존의 보이그룹의 춤의 전형을 깼다. 노랫말 중 ‘우아한 손짓과 은근한 눈빛’처럼 따르는 퍼포먼스도 은근한 동작이 주를 이룬다. 절도나 파워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리듬에 따라 간드러지는 동작을 주로 선보인다. 그와 호흡을 맞추는 댄서도 모두 여자다. 태민은 여자 댄서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간 샤이니 활동을 하며 보여준 칼군무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절도 있는 군무나 파워풀한 동작 대신 몸의 유연성을 이용해 가볍게 어깨나 다리 등을 움직인다. 오히려 여성 댄서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은근한 웨이브와 동작들을 많이 활용했다. 여성적인 섹시함이 묻어나는 이유다. 안무라기 보단 몸짓에 가까운 그의 퍼포먼스는 끈적하기까지 하다. 젠더리스 안무를 찾을 때 태민의 '무브'가 제일 먼저 꼽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또한 태민의 안무에서 분명히 할 점은 그의 퍼포먼스가 진취적이고 멋있는 느낌을 안긴다는 거다. 댄서들 사이에서도 '무브' 퍼포먼스가 높게 평가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사진=배우 진서연 인스타그램)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젠더리스의 지향점은 성역할 구분을 없애는 측면을 봤을 때 양성평등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아직 젠더리스 문화가 양성평등적 관점의 운동이라기 보단 상업적인 것과 연관된 부분이 많다. 중성적이라는 또 하나의 소비 트렌드를 만드는 거다. 남성의 화장품은 새로운 시장을 여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 평론가 미디어에서의 젠더리스 흐름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는 “미디어에서의 젠더리스에서 상업적인 걸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일상에서 어떠한 가치로 실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요소다”며 “이제 남성이 부엌을 들어가는 걸 긍정적으로 본다. 그런 면에서 충분히 미디어의 긍정적 효과가 있다. 계속적으로 젠더리스가 상업적인 틀 안에서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오인할 가능성이 높다. 그 부분에서 위험성이 있다고 보는 거다. 전반적으론 긍정적인 변화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산업적인 걸 없앨 순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라도 중성적인 문화가 생긴다면 성평등 등의 시너지를 만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